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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쿠스토

Jacques-Yves Cousteau

자크 쿠스토는 수심 90m 아래에서 바다를 사랑하도록 한 세대를 가르쳤다. 하지만 애닉 웨버가 알게 되었듯
이 해양 탐험가의 야망과 애정은 늘 표면 가까이에서 헤엄쳤다.


1977년 가을, 자크 쿠스토는 6주간 미국 투어 중이었다. 당시 미국 텔레비전에서 방송 중인 그가 애착을 가진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방문한 도시마다 강의가 매진되고, 록밴드보다 많은 인파가 몰렸다. 시애틀에 머무는 동안, 행사 전 한 무리의 지역 학생이 그를 만나러 왔다. 그중 한 아이가 다채로운 색으로 그린 수중세계 그림을 건네며 바닷속 깊은 곳은 어떤 모습인지 수줍게 물었다. “바닷속은 정말 환상적이란다.” 쿠스토가 환하게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마치 우주를 떠다니는 기분이지.”

마르고 긴 얼굴에 빨간 모자를 쓰고, 뚜렷한 프랑스 억양으로 말하는 당시 67세의 이 해양학자는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이 행성 일부의 문을 연 인간으로서 전 세계인을 매료시켰다. 쿠스토는 떠다니는 실험실이기도 한 배 칼립소를 타고 세계를 항해하며 바다와 모든 수중생명체를 탐구하는 데 일생을 바쳤고, <자크 쿠스토의 해저세계><쿠스토 오디세이> 같은 인기 시리즈로 수백만 시청자와 그의 모험을 공유했다. “그는 굉장히 카리스마가 넘치고 쇼맨십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어려운 과학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해양 환경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다.” 그의 전기 『자크 쿠스토: 바다의 왕』의 작가 브래드 매트슨이 전화로 말했다. “우리 인간이 바다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바다를 항해하며 수중세계를 촬영하겠다는 그의 생각에 당장 매료되었다. 그는 우리가 상상 속에서나 갈 수 있던 곳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재미있게도, 흡사 아이 같은, 주변에 크게 영향을 미친 열정을 가졌음에도 어린 시절의 쿠스토는 해양 탐험가가 되겠다는 꿈도 꾸지 않았다. 1910년 보르도 인근의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소년 시절에는 조종사이나 영화감독, 의사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10살 생일을 맞이하기 전에 다이빙을 배웠지만, 그는 용돈을 모아 13살에 초기 파테 영화 카메라를 사고 이후에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 해군 항공 훈련을 받아 자신이 세운 목표를 추구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안개 자욱한 저녁, 아버지의 스포츠카를 들이받고 두 팔이 모두 부러지면서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고 말았다. 이 사고로 비행기를 조종하겠다는 꿈을 재고해야 했던 쿠스토는 대신 바다로 눈을 돌려, 1940년대 해군학교 친구들과 수중 영화를 촬영하기 시작하고 더 오래 잠수를 가능하게 하는 호흡 장비를 실험했다.

오늘날 쿠스토는 무엇보다 ‘아쿠아렁 스쿠버 호흡기’의 공동 발명가로 유명하지만, 그가 이 기계를 만든 것은 최고의 장면을 담으려는 끊임없는 탐색 과정의 일환이었다. “다소 무모해 보였지만, 쿠스토의 발명품들은 사실 굉장히 실용적이었다.” 매트슨은 설명한다. “그가 아쿠아렁을 만든 것은 (1943년작 영화) <잔해>를 찍기 위해서였다. 그는 원형 아쿠아렁을 매고 한 첫 바다 다이빙에서 랍스터를 잡았다. 그는 기회주의자였다. 과학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것을 하기 위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행동했다.” 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2차대전으로 <잔해>를 찍을 공필름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어린이용 카메라 브랜드를 위해 고안된 작은 필름 수백 통을 이어붙여 촬영한 것이다.

“바다의 가장 무시무시한 괴물은 네스호가 아닌, 바로 우리 안에 살고 있다.”

이후 1956년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다큐멘터리 <침묵의 세계>에서는 24km가 넘는 필름을 사용했고, 최종 버전에 사용된 분량은 10분의 1 정도였다.

쿠스토가 한 모든 일은 오롯이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린 결과였다. 어린 시절의 꿈이었던 비행에 가장 근접한 일이 바닷속을 유영하는 것이었기에, 그는 깊은 바다가 주는 자유를 좇으며 이후 세대를 위해 이를 포착하기 위해 경계를 확장해나갔다.

쿠스토는 이렇게 썼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중력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진다. 지구에 접합된 셈이다. 하지만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만 하면 자유로워진다. 물의 부력으로 손을 뒤집기만 하면 위, 아래, 옆 어느 방향으로든 날아갈 수 있다. 물밑에서는 인간이 대천사가 된다.”

그는 계속해서 열정을 추구하기 위해 기존의 시스템 밖에서 생각했다. 1960년대 쿠스토와 그의 팀은 해저에서 직접 생활하며 일할 수 있는 일련의 가압 수중 거주지를 만들었다. 현실의 수족관처럼 시야가 탁 트인 넒은 창을 통해, 보다 깊은 곳에서 해양 환경을 연구할 수 있었다. 팀원들은 30일 연속으로 바닷속에 있다가 다시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내며 세계 신기록을 세웠고, 그 기록은 51년 후 쿠스토의 손자 파비앙 쿠스토가 깨뜨리게 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쿠스토는 해저 세계를 탐험하고 촬영하는 데 생애 전반부를 바쳤고, 그 후에는 1997년 세상을 뜰 때까지 해양 생태계 보존 활동에 집중했다. 그는 40년이 넘도록 바다 탐험을 하면서, 한때 풍요롭고 생물이 다양한 영역이 오염에 희생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그가 젊은 시절 뛰어들었던 물이 중금속과 여타 독성 물질에 의해 맑음을 잃어갔고, 그로 인해 “바다의 가장 무시무시한 괴물은 네스호가 아닌, 바로 우리 안에 살고 있다.”고 결론내리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바다의 위태로운 상태에 대해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그는 1973년, 현재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는 ‘쿠스토 협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그 무렵, TV 시리즈 <쿠스토 오디세이> 에서 과거 다채로웠던 해양 생태계의 장면과 오늘날 황량한 현실을 대비시키며 환경 재앙을 집중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쿠스토가 TV에 보여주기 전까지 대부분 가정에서는 생태학이라는 개념을 잘 알지 못했다.” 매트슨은 주장한다. “사람들은 우리의 방식을 바꾸지 않으면 자멸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쿠스토는 환경운동의 대중화를 이끈 최초의 사람은 아니지만, 최초의 대중적 영웅이었다.”

이전 세대 누구보다 수중세계에 대해 많은 것을 밝혀냈지만, 쿠스토는 기존 과학계에서는 아웃사이더였다. 일부 해양학자는 그의 연구의 중요성에 의구심을 보였고, 어떤 이는 특히 그의 생태계에 대한 헌신을 두고 위선자라며 비난했다. 그들은 첫 임무에서 BP 같은 석유기업의

후원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해양 보존의 옹호자로 변신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그가 자신의 영화 속 최고의 야생동물 장면을 얻기 위해 돌고래를 포획했다는 비난도 들끓었다. 그러나 쿠스토의 추종자들은 그가 자신의 잘못을 자각했으며, 그의 보존 노력은 1950년대 그가 저지른 몇 가지 잘못을 되돌리려는 정직한 시도라고 반박한다.

오늘날 중요한 것은 그의 활동으로 몇 세대에 걸쳐 연구할 토대가 마련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양 보호의 중요성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분 덕분에 많은 꿈을 꾸고 호기심을 키울 수 있었다.” 파비앙 쿠스토는 할아버지가 남긴 유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분의 활동은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더 나은 결정을 내리도록 이끌었다. 그래서 앞으로 바다를 훼손하지 않고, 생명유지장치로서 바다와 함께 살아나가기를 바란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만 하면 자유로워진다. 물밑에서는 인간이 대천사가 된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기만 하면 자유로워진다. 물밑에서는 인간이 대천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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