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탈무드에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나요? 더 이상 쉬쉬할 비밀이 아니잖아요.
예시바(정통파 유대교도를 위한 학교-옮긴이)에 다닐 때 그 질문을 한 적이 있어요. 탈무드에는 적어도 여섯 개의 성性이 존재한다고 나오지 않냐고. 하지만 대답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어요. ‘아, 고대 예루살렘에는 존재했었지. 하지만 이제 그런 건 더 이상 없어.’ 정해진 대답이었죠! 그게 아니면 은유적인 표현이라고 했어요. ‘그건 영혼이 그렇다는 거지. 실제로 그렇다는 게 아니란다.’ 이것도 애용되는 답변이었죠. 제가 십대가 된 이후로 아버지는 제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고, 아버지의 감은 틀린 게 아니었어요. 저는 2년간 남자 아이와 사귀었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보다 오래 누군가를 사귀어본 적이 없어요. 당연히 누구도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지 못 했지만 우린 스스로 필요한 것들을 터득해나갔어요. 그리고 2015년 11월, 저는 아버지와 마주 앉았어요. “아버지는 제게 분명 뭔가가 있다고 늘 말씀하셨죠. 이제 말씀드릴 준비가 됐어요. 저와 랍비를 만나러 가시겠어요?” 저는 제 감정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랍비는 확실히 현명하셨어요. “아니. 영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라고 하셨죠.
일리가 있네요. 아버지의 언어를 사용하라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했어요. 우린 정말 흥미로운 글을 찾아냈죠. 18세기 즐로초브 왕조의 하시드파 레베 미셸의 말씀 중에 때로는 여성이 남성의 육체로 환생하기도 한다는 내용이었어요. 우리는 그분의 직계 후손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그 말을 그냥 묵살할 수 없었죠. 랍비와 저는 저의 성전환에 대해 이런 영적인 개념을 활용했어요. 사실 제겐 정체성과 생물학적 문제였지만 아버지가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의 틀은 영적인 거였어요. 한 시간 쯤 지났을 때 아버지가 납득했다는 것을 아버지의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어요.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래, 이런 일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치자. 하지만 오직 자딕[유대교의 성인聖人, 고결한 자]께서만 이 사실을 확실히 아실 수 있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당신이 신뢰하는 권위자가 확인을 해주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거였죠.
남자들이 몸의 육체적인 부분과 영적인 부분을 분리하기 위해 가르틀[기도할 때 허리에 두르는 띠]을 두른다는 거 아시죠? 여자들은 그 띠를 두르지 않죠. 왜냐하면 여자는 육체적이기만 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저는 어릴 때부터 늘 남자들은 영적이고 여자들은 육적인 존재라는 설명을 들으며 자라났어요. 남자들은 신과 소통하고 여자들은 남자를 통해 신을 영접하기 때문에 남자들이 신과 소통할 수 있도록 나머지 궂은일을 모두 해야 한다고 했죠. 그러니까 당신의 아버지께선 당신의 성의 전환이 영적으로 멀어지는 행위라고 볼 수도 있었겠어요. 여성의 몸으로 들어가면서 신에게서 멀어진다고요.
아버지는 종교적 은유 따위를 모두 버리고 이디시어로 말하기 시작하면서 랍비를 우리 대화에서 소외시켰어요. “너 대체 왜 이러는 거냐?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하찮은 존재잖니.” 아버지는 마치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듯이 얘기했어요. “아무리 여자들 기분을 맞춰주려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 해도 너랑 나, 우리끼린 진실을 알고 있잖니.” 이런 식으로요. 그래서 정말 돌아버릴 것 같았어요. 한 시간 넘게 제 마음 속 얘기를 다 쏟아냈는데 아버지가 그렇게 나오니까요. 제가 서너 살 때 제 남근을 잘라버리고 싶었던 일까지 다 말씀드렸는데 말이죠.
애비씨, <언오소독스>가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하시드파 사람들이 앞 다퉈 이런 칼럼을 썼던 거 기억하세요? ‘이건 역겨운 거짓말이다. 여성은 우리 공동체에 가장 중요한 존재다.’ 그리고 성서에서 ‘여성의 기쁨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기록되어있는 부분들을 찾아내어 증거로 제시했던 것?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우리는 성서를 공부하고, 최고의 권위는 성서에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그 말씀을 매일 무시하고 있다고?
그들은 종교에 집중하다고 생각하지만 아니에요. 그 사람들에겐 첫째도 문화, 둘째도 문화, 오직 문화, 문화만을 강조할 뿐이에요. ‘네가 만약 옷을 이렇게 입지 않는다면’, ‘네가 만약 이런 언어를 쓰지 않는다면’, 이런 것들은 사실 종교와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저는 어린 시절에 겪은 이런 모순이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아요.
당연히 트라우마가 되죠. 저는 오로지 성서의 말씀에만 매달렸기 때문에 그나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매달렸다는 건 무슨 의미죠?
제가 열여섯 살 때 「샤아르 하길굴림」[환생의 문](하이임 비탈이라는 랍비가 16세기에 그의 스승의 가르침을 기록한 책-옮긴이)을 공부하며 성을 전환해서 환생하는 것에 대해 읽었거든요. 하지만 이 책을 아버지에게 들고 가서 “아버지, 이게 나예요.”라고 말한다고 해도 아버지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고 인정하지도 않을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죠. 성서와 현실에는 괴리가 있었어요. 저는 성서의 말씀에만 집중했어요.
그렇다면 가족과 공동체를 떠날 때도 성서를 거부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나요?
사실, 저는 성서를 거부합니다. 성서가 무조건 신성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그런 식으로 종교를 믿는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제게 하나님을 믿냐고 물어오면 저는 늘 이렇게 대답합니다. “먼저 믿음과 하나님의 의미를 정의내려야겠죠.” 우리의 성장기에 함께 했던 하나님을 떠올려보면, 저는 하늘에 사는 무서운 귀신이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만……. 하시드 유대교나 전체로서의 유대교의 메시지 중에 제가 좋아하는 것들도 많아요. 그저 자기 편한 대로 이건 취하고 이건 버리고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에요.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해왔던 것 같아요. 그래요, 저한테는 맞지 않아도 그들에겐 그 방식이 맞을 수 있고,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정통파 공동체가 아닌 곳에선 질문을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특징이라고 하잖아요. 어릴 때도 그렇다고 들으며 자라났던 것 같은데, 현실에선 꼭 그렇다고 할 수 없죠.
여자들이 율법을 공부하면 안 되는 이유가 하나님이 여자를 질문이 너무 많은 존재로 창조했기 때문이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렇게 질문이 많은가보네요.
지금 당신과 종교의 관계는 어떤가요?
저는 임명을 받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서 합법적으로 공인된 랍비 학위를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법적으로도 저는 여성이기 때문에 저는 하시드파의 첫 번째 공인된 여성 랍비이기도 하죠. 학위를 따기가 쉽진 않아요. 5년이나 걸렸죠. 하지만 저는 제가 무엇에 저항하고 있는지 제대로 알고 싶었어요. 저는 제대로 배운 이단아가 되고 싶었죠.
랍비의 의무도 수행하고 있나요?
처음에는 그와 관련된 일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차츰차츰 깨닫기 시작했죠. 제가 그 방면에 능력이 있다는 걸 말이죠. 좋은 의미로 힘이 있는 자리란 것도 깨달았어요. 진보적인 집단에서도요. 저는 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의식이나 관습을 지키는 것에 나는 아무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어떤 공동체에 속하길 원한다면 영적인 공동체를 찾아야 한다고는 생각합니다.” 지금도 누군가 절 ‘랍비 애비 스타인’이라고 부르면 손발이 오글거려요. 하지만 저는 그것을 타이틀이라기 보단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그 호칭에 좀 더 편안해졌어요. 진화하고 있는 거죠. 우리는 늘 세상에는 하나의 진실만 존재하고 삶은 불변하다고 들으며 살아왔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저는 언제나 모든 것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고 믿어요. 제가 삶의 모든 것을 다 통달하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 다음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