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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두이센

컬트 건축가와 함께하는 집.
Post by Anna Winston. Photo by Lasse Fløde.

컬트 건축가와 함께하는 집.
Post by Anna Winston. Photo by Lasse Fløde.

빈센트 반두이센은 꼬리표에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특별히 거슬려 하는 것은 한 가지다. “용어가 사용되는 방식이에요.”라고 그가 입을 열었다. “우선 ‘미니멀리즘’이라는 건 대단히 급진적인데 나는 머리에서 발까지 급진과는 거리가 멀어요. 나는 고객과 나 자신에게 따뜻하고 편안한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여기까지 왔어요.”

우리는 처음으로, 벨기에의 건축가이자 디자이너인 그를 앤트워프에 있는 그의 집에서 만났다. 미니멀리즘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물론 나는 미국 미니멀리스트 아티스트들의 열렬한 팬이에요. 그러나 미니멀리즘을 뼛속까지 파고들어 모든 걸 벗겨내버리는 거라고 여겨, 오브제 하나 또는 예술 작품이나 책 한 권도 못 두게 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미니멀리즘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나를 미니멀리스트라고 부르면 이렇게 말해주죠. ‘친구들, 나를 모르는군. 당신들은 나를 몰라’.”

그의 작품에 친숙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식의 열정적인 호언장담이 전혀 놀랍지 않다. 반두이센에 관한 한 차갑고 냉정한 것이란 없다. 천연 소재와 색감에 집중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작품의 표면이 만져보고 싶은 질감을 지니고 있다. 그의 컬러 팔레트는 모노크로마틱하게 보일 수 있지만 색조와 색감이 풍부하다. 동료 디자이너이면서 이전에 디자인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던 일세 크로포드는 언젠가 그의 작품을 ‘감각적’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아주 잘 어울리는 말이다. 반두이센의 작업 방식은 완전주의이기도 하다. 그는 ‘나의 세계’가 건축, 인테리어, 가구, 제품 디자인이 결합하여 창조된다고 말한다.

최근 완공된 앤트워프의 어거스트 호텔 을 살펴보면 이 총체적인 접근법이 좀 더 잘 이해된다. 이 호텔의 모든 것은 레스토랑의 소품 하나까지 반두이센과 그의 팀이 디자인했다. 혹은 그의 집을 살펴봐도 된다. 식품 보관소, 욕실, 전자제품, 침실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거의 동일한 디자이너의 검정 야구 모자들 등 ‘복잡다단한 것’들은 대부분 찬장 또는 옷장 벽 뒤쪽에 숨겨져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실제 생활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거의 모든 방마다 책과 잡지가 최소한 세 무더기 정도는 쌓여 있는데, 거기에는 플랑드르어 및 영어로 된 소설들, 철학책, 『내셔널 지오그래픽』지들이 읽던 그대로 놓여 있다. 그는 이 책과 사물들이 각 공간의 ‘주인공’이라고 표현한다.

반두이센은 1980년대 후반에 앤트워프로 이사했다. 그의 문화적 배경에는 과거 가톨릭 기숙사 학교에서 8년을 보낸 시절이 있었다. 당시 그는 반항적이었다. “나쁜 아이는 아니었지만, 뭐든지 탐구하면서 지냈죠.” 그는 부모 모르게 앤트워프 패션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렀고, 합격했다. 같은 시기에 그의 부모는 개인 교사를 고용해 더 전문적인 건축 시험-그가 가장 애를 먹은 분야다-을 치르게 했으며, 그는 그것 역시 합격했다.

1985년에 반두이센이 처음으로 자신의 집을 설계했을 때, 앤트워프는 대단히 독특한 문화와 디자인의 중심으로서 명성을 굳혀가고 있었다. 그 후 25년이 흘렀지만, 이 첫 번째 집의 거실은 핀터레스트 게시판과 블로그, 홈인테리어에 영감을 불어넣는 사례 모음에 정기적으로 등장하며, 종종 도심에 위치한 그의 작업실에서 쉽사리 걸어서 갈 수 있는 지금의 집 사진도 함께 올라온다. 이 집은 19세기 신고전주의 건축물이라서 벨기에에서 플랑드르어를 쓰는 북부 지역의 전형적인 집의 형태인 17세기 방식의 더 좁은 벽돌집들 사이에서 눈에 띈다.

그가 설계한 두 집은 대단히 비슷하다. 그의 디자인에서 수십 년 동안 일관성이 놀라울 정도로 유지된다는 방증이다. 두 집 모두 색조를 낮춘 동일한 질감의 벽 마감재를 썼고, 창이나 조리대 같은 기능적 요소에 거의 검정이라고 할 색으로 디테일을 처리했으며, 똑같이 숨겨진 붙박이와 잘 다듬어진 세부 장식으로 꾸몄다. 그의 건축이 늘 그렇듯이, 현재 그의 팀이 작업 중인 쇼룸, 상점, 호텔, 사무실 등에서조차 양식화된 가정의 분위기가 배어나온다. 의류 브랜드 <로로 피아나>와 백화점인 <라리나센테>의 상점들, 벨기에의 와이너리 등이 그런 예다.

밖에서 보면 그의 건물은 더 엄격하고 규율적이며, 모더니즘의 느낌이 든다. 인테리어에서 느껴지는 감촉과 대조적이다. 그는 자신의 디자인 접근을 직관적이라고 표현한다. 수학은 여전히 그의 강점이 아니다. “내 재능은 다른 쪽이에요.”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 팀은 그걸 알죠. 나는 아주 언어적이며, 서사로 푸는 것을 대단히 좋아하며, 이미지와 대화하곤 해요.” 그는 그날그날 실행되는 모든 프로젝트에 관여하고 있다.

반두이센이라는 이름 자체는 벨기에와 연관되어 있지만, 그는 자신이 지중해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그것은 어머니 쪽 가계가 지중해 민족의 선조라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고, 장학금과도 관련이 있다. 젊은 디자이너 시절 반두이센은 이탈리아 및 그 나라의 디자인 산업과 관계를 맺으면서 대단히 큰 영향을 받았다. 20대에는 포스트모더니스트 디자이너이자 건축가인 알도 치빅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알도 치빅은 멤피스 운동(Memphis movement, 1981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일어난 포스트모던 디자인 운동. 선명한 색채와 개성적이고 비정형적인 형태 등을 특징으로 한다-옮긴이)을 일으킨 에토레 소사스의 밀라노 스튜디오 쪽 파트너였다.

이 경험은 그의 절제되고 조용한 미적 감각과 전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그는 지적인 부분에서 분명히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나는 스물두세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였고, 이 모든 지적인 사람들, 이 미친 파졸리니(Pasolini, 이탈리아 영화감독-옮긴이) 같은 사람들과 함께 광기-포스트모더니즘의 끝-에 휩싸였어요. 그들은 완전히 격이 다른 방식으로 내게 건축을 가르쳤어요.”라고 그는 회상한다. “당시 소사스와 알도 치빅이 나를 사로잡았던 것은 기본 형태에 대한 그분들의 관심이었어요. 내가 작업한 첫 컬렉션 중에
‘스탠더즈(Standards)’라는 것이 있는데, 기본을 지키면서 재미있게 변화를 준 가구 시리즈였죠.”

그가 벨기에로 돌아와 1989년 자신의 사업을 시작했을 때 가구 디자이너로서의 가능성을 처음 발견해준 사람도 이탈리아인이었다. 시대의 아이콘으로 각광받던 가구 브랜드 <카펠리니>의 대표인 줄리오 카펠리니가 “내 인테리어와 가구를 이탈리아 건축 양식으로 여겨준 겁니다”. 카펠리니로부터 의뢰를 받아 진행한 프로젝트가 이탈리아 가구 브랜드들과의 수많은 컬래버레이션의 출발점이었다. 2016년, 그는 <몰테니앤드씨(Molteni&C)>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몰테니앤드씨>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구 박람회인 살로네 델 모빌레(Salone del Mobile, 흔히 밀라노 가구박람회라고 한다-옮긴이)의 창설자 가족이 만든 가구 회사다. 반두이센은 비이탈리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책임자가 되었고, 이제 그 스스로 그들을 가족으로 여긴다.

나를 미니멀리스트라고 부르면 이렇게 말해주죠.
친구들, 나를 모르는군. 당신들은 나를 몰라

아티스트 스털링 루비의 판지 작품이 내려다보는 거실의 옆면을 따라 기다란 나무 탁자가 놓여 있고, 반두이센은 거기 앉아 있다. 그는 사진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엄격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활력적이면서 따뜻하다. 자신의 시그니처라 할 복장, 즉 머리에서 발가락까지 검정-표준적인 건축가 유니폼의 캐주얼 버전-으로 입고서 그는 무장해제 상태로 마음을 열고 있다. 심지어 그는, 자기가 쓰는 야구 모자는 날이 추울 때 면도한 민머리로는 절대로 나다니지 말라는 의사의 권유에 따른 것이라는 농담을 건네왔다.

그렇다고 그가 무뚝뚝하지 않다는 건 또 아니다. 그는 앤트워프와 다른 유럽의 도시들에서 오래된 건물을 이리저리 다듬어 ‘럭셔리 아파트’로 파는 데 자신의 스타일이, 그것도 생기 없는 형태로 너무 많이 인용되는 것에 대해 짜증스러움을 감추지 않는다. 이처럼 파사디즘(facadism, 우아한 건축물의 전면 외관을 보존하는 관행-옮긴이)을 보여주기식으로 적용하는 것은 이른바 ‘벨기에 미니멀리즘’이라고 불리는 미학으로 돈을 벌어보려는 개발업자들 때문에 생겨났다. ‘벨기에 미니멀리즘’이라는 용어는 2010년대 초, 반두이센과 그의 동료 악셀 베르보르트가 예시한 미학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들은 반두이센의 접근법에서 중요한 부분을 놓치기 일쑤였고, 그의 최고 작품이 지닌 섬세함도 부족했다. 표면은 너무 반드르르했고, 흰색은 너무 번쩍거렸으며, 검정은 단조로웠다. 반두이센 본인의 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납공간은 전체 공간을 개방시켜주는 핵심인데, 그들에게는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 “내 작품이 영감을 많이 자극한다는 걸 알고 있어요. 그래서인지 벨기에에는 닮은꼴들이 너무 많아요.”라고 그는 말한다. “물론 내가 다른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건 좋은 일이지만, 나의 접근법이나 수많은 재료를 다루는 방식은 엄청나게 복잡합니다. 몸으로 감촉할 수 있는 세상이 내 작품에는 편재해 있죠. 그것이 바로 나라고 하는 사람을 반영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는 그들이 그러는 것에 대해 사소한 성가심 정도로만 받아들인다. “내 작품은 좀 더 심오하다고 할 수 있어요. 더 다층적이죠.” 반두이센은 다소 오만하게 말한다. “베낄 수가 없어요. 운 좋게도 내게 이 선물이 주어진 겁니다. 이 스타일, 감촉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나는 여전히 나 자신, 내 고객에게 놀라움을 선사할 수 있습니다.” 반두이센의 집에는 검정이나 흰색이 거의 없다. 어떤 색이든 파란색, 녹색, 갈색과 섞여 탁하게 녹여진다. “대부분의 색은 목재, 푸른 돌, 우리 주변의 사물, 식물 등의 물질에서 나옵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나는 [멕시코의 모더니즘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의 찬양자예요. 멕시코에 있는 그의 프로젝트를 다 둘러보았을 정도죠. 그러나 그는 색을 쓸 때 멕시코 문화를 반영합니다. 그 색들이 문화적 맥락 안에서 그의 건축을 떠받치는 겁니다. 벨기에에서는 색을 쓰는 방법이 다른 거죠.”

그의 집은 디너파티를 열고 많은 손님을 수용하기에 충분하지만, 그는 그런 식의 초대는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초대를 할 때도 대개는 몇몇 친구들에 국한된다는 것이다. 그는 집을 안전한 안식처, 고요한 섬으로 묘사하며, 일이 없을 때는 웬만하면 집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의 동료 중 많은 이들-1980년대와 1990년대에 패션과 건축의 중심지로서 앤트워프의 명성을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한 앤 드묄레미스터, 드리스 반노튼 등의 창조 세대-이 밀집 개발된 플랑드르에서 교외로 빠져 더 큰 집으로 옮겨갔지만, 반두이센은 딱히 도시를 떠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자신의 집이 이미 시골집 같은 안온함을 주기 때문이다.

반두이센은 내년에 60세가 된다. 그는 외동이며, 작년 여름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아버지는 연로하지만, 여전히 아들의 작업에서 사업적인 부분을 봐주고 있다. 반두이센에게는 자녀가 없다. 그는 자녀를 갖고 싶어 할까? 이 건축가는 일, 예술, 책, 명상, 집 그리고 다시 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입을 쉬는 법이 없다. 그러나 이 질문에는 놀랄 만큼 오래 침묵했다. “나는 운명을 믿는 것 같아요. 그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그가 파블로를 안으며 말했다. 파블로는 그가 기르는 닥스훈트 세 마리 중 하나다. 셋 모두 누가 봐도 주인에게 헌신적이었다. 계속해서 방어적으로 주변을 맴돌다가 주인이 관심을 주지 않으면 짖어댔다. 대화의 분위기가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내 개들이 아이들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죠.” 그가 웃었다. “그래도 녀석들이 내 어린 아가들입니다.”

“게다가 이제는 별달리 문제가 되지 않지만 나는 게이에요. 그리고 보수적이죠. 내 작품을 보면 변형된 형태의 보수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내가 내 아이들을 교육하려 했다면 문제가 많았을 것 같아요. 아이들과 매일 함께 있고 싶어 했을 텐데, 그건 불가능하죠. 누군가를 사귀지 않는 한, 내가 부모님을 봉양한 것처럼 나를 돌봐줄 사람이 있을까요? 그 사람을 통해서도 친구, 사촌, 조카 들이 생길 겁니다. 나는 남들과 다른 방식으로 가족을 만들 거예요.”

그가 몇몇 고객과의 유대 관계에 대해 말하는 걸 들으면, 그들 역시 그의 가족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들은 그의 공간에 거주하며, 그의 세계의 일부를 소유한다. 카니예 웨스트가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며 흥미로운 사람일 것이다. 1 웨스트는 앤트워프의 모든 것에 매료되어 이 도시의 거주 지역 한곳에 집을 사기로 했다는 소문이 있다. 그러니까 그가 반두이센에게 전처인 킴 카다시안과 함께 지낸 캘리포니아 집에 관한 공동작업을 의뢰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요즘 카니예는 앤트워프에 들르면 반두이센의 집을 방문해 나무를 이어붙인 다락방에 머무르곤 한다. 살면서 본 가장 섹시한 방이라고 그가 묘사했던 그 방이다.

“알겠지만, 카니예는 천재예요.”라고 반두이센은 말한다. “예술가죠.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아주 정서적인 사람이에요. 그는 극단성을 지니고 있고, 그와 그런 이야기도 해요.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와 죽이 잘 맞는다는 거예요. 우린 친구예요. 서로를 좋아하죠. 그를 따라잡는 것이 늘 쉬운 건 아니지만, 그런 식으로 그는 나를 안전지대 밖으로 끌어내줍니다.”
2주 전, 웨스트는 바로 이곳 반두이센의 거실에 나타나서는 가구를 몽땅 밖으로 들어내달라고 했다. “그는 정말로 공간의 본질, 신성한 건축 그 자체, 수도원에 들어가 있었어요. 모든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 공간의 순수성 속에 서 있었죠.”라고 그가 되새겼다.

감사하죠. 내가 배울 수 있는 사람들, 훌륭한 대화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이거예요. 이게 나예요.”

(1) 악셀 베르보르트가 킴과 카니예의 로스앤젤레스 집을 주도적으로 디자인했고, 반두이센이 거실과 어린이 방의 가구, 설비를 맡아 프로젝트 디자이너 그룹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클라우디오 실베스트린, 피터 워츠도 이 그룹의 멤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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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킨포크 43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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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악셀 베르보르트가 킴과 카니예의 로스앤젤레스 집을 주도적으로 디자인했고, 반두이센이 거실과 어린이 방의 가구, 설비를 맡아 프로젝트 디자이너 그룹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클라우디오 실베스트린, 피터 워츠도 이 그룹의 멤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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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킨포크 43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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