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등장하는 한 장면은 젊은 연출가 리나 더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연극에서 리를 본 더넘은 그녀에게 「걸스」의 콧대 높은 갤러리 직원 수진 역할을 맡겼다. 「걸스」의 대본 연습 때 리는 코미디언 에이미 슈머와 재회했다. 슈머와는 언젠가 오디션 후에 엘리베이터 안에서 처음으로 만났었다. 슈머는 〈코미디 센트럴〉에서 방영하는 자신의 쇼 「인사이드 에이미 슈머」에 리를 캐스팅했다(당신은 엄청난 화제를 낳은 「칭찬」 편에 출연한 리를 기억할 것이다. 여러 명의 여성이 스스로를 심하게 망가뜨리는 내용이다). 비슷한 시기에 리는 「하이 메인터넌스라」는 드라마의 웹 에피소드에 출연했고 그 후 이 에피소드는 ‘집 없는 하이디’라는 제목으로 HBO로 이전했다. 살 곳이 없어 데이트 앱에서 만난 사람의 아파트에 얹혀 사는 여성에 대한 내용이었다. 2014년에 리는 「뉴 걸」에서 비슷한 역할인 제이크 존슨의 연인 카이를 연기했다. 그녀가 자신을 남들은 모르는 상속녀라고 밝히기 전까지 존슨은 그녀 역시 사기꾼이라고 생각한다.
리는 갑자기 다양한 배역을 따내기 시작했지만(그녀가 화면에 등장할 때마다 특이한 유머 덕분에 무표정 연기의 효과가 두드러졌다) 그녀의 성공이 여러 백인 여성 크리에이터 덕분에는 가능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괴롭혔다. “가장 친한 동료들과 함께 있을 때도 이렇게 깨닫는 순간이 찾아오곤 했다. ‘아. 너희는 아직 세상을 그런 식으로 보는구나.’” 그녀가 스크램블드 에그를 한 입 먹으며 말한다. “나는 이 업계에 오로지 주변인으로밖에 참여할 수 없겠구나, 인종차별이 너무 깊이 뿌리박혀 있어 우리는 절대 바로잡을 수 없겠구나 싶었다.” 언젠가 리가 슈머에게 아시아 여성들을 위한 비중 있는 역할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자 슈머는 유일한 해결책은 리가 직접 대본을 쓰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래, 이 바보야, 가서 컴퓨터를 켜고 탁탁탁 글을 쓰면 되지’ 이런 말투였다. 그 말이 참 웃긴 게 절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리는 글을 쓰겠다고 자리에 앉았지만 애당초 그런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부아가 났다. “내가 꿈꾸던 연기를 계속하기 위해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 현실이 진심으로 못마땅했다. 그러다 내가 나 자신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은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 바뀌지 않는 세상에서 사는 것도 힘들었다.”
리가 말하길 처음에 그녀가 쓴 원고는 “완전 오글거리고, 솔직히 형편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걸즈」의 스토리 에디터이자 현재 HBO 프로그램 「배리」의 제작자인 친구 제이슨 김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교활한 한국인 여성을 둘러싼 드라마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치스러운 취향을 가졌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범죄도 서슴없이 저지를 인물이다. “그녀는 지극히 백인화되었을 경우의 내 모습에 가깝다. 내가 브렌트우드에 살고 바비 인형을 따라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들은 이 드라마에 「코리아타운」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2018년에 HBO에 소개했다. 이 방송국은 그들의 제안을 곧장 받아들였다. 리와 김이 제작을 진행시키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우리가 만나기 며칠 전에 그녀는 최종 대본을 제출한 상태였다. 리는 방송이 제작될 거라 확신했다. 그녀는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고 불법을 예사로 저지르는 아시아 가족이라는, 자신이 늘 보고 싶었던 드라마를 썼다. 이 드라마가 팔린 다음 인터뷰에서 그것을 「소프라노스」와 비교하자 그녀는 한인 사회가 부정적으로 그려지지 않을까 우려하는 이들로부터 약간의 질책을 받았다. 이것이 바로 가장 어려운 과제라고 그녀는 말한다. 소수집단을 다루는 프로그램이 흔치 않기 때문에 작가들은 훈훈한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부담까지 떠안아야 한다. 그러나 리는 그녀와 그녀의 등장인물들도 여느 사람들처럼 사악하고 냉소적이고 복합적인 도덕성을 지닐 수 있다고 믿는다.
“시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아, 그러면 한인들 이미지가 나빠지는 거 아냐? 그들을 범죄자로 만들 작정이니?’” 그런 반응은 정말 의외였다. 「소프라노스」를 보면서 ‘아 이런. 우리가 이탈리아인을 악당들로 만들고 있어!’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이중 잣대는 여전히 존재한다.”
일단 직접 대본을 쓰기 시작하자 그녀는 멈출 수 없었다. 「코리아타운」과 더불어 이제 그녀는 한국 여성들을 소재로 하는 다른 작품 두 편을 작업하고 있다. 하나는 김정은의 여동생의 삶을 상상한 익살스러운 시트콤이다. “그의 오른팔이 사실은 여동생이라는 음모론이 있다. 그래서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좋아, 그녀에게 막강한 권력을 쥐어주어 여성도 소시오패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면 어떨까?’ 재미있는 생각 같았다.”
또 다른 프로젝트는 훨씬 진지하다. 1950~60년대에 활동한 한국의 삼인조 가수 김시스터즈의 이야기다. 그들은 한국전쟁 중의 미군부대 위문을 시작으로 미국에서도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역사상 최초의 케이팝 그룹이다. 미국에 건너와 「에드 설리번 쇼」에도 출연했다.”
「에드 설리번 쇼」에서 21차례나 공연했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잊혔기에 리는 사실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을 느꼈다. “무엇보다 이 여성들은 한 사람당 20가지 악기를 배운 음악 천재들이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영어를 배워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그들을 모른다.”
드러나지 않는 역사에 다가가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애쓰면서도 리는 카메라 앞에 점점 자주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최근에는 레슬리 헤드랜드가 제작한 컬트 히트작 「러시아 인형처럼」에 나타샤 리온에게 생일 파티를 (여러 번 거듭해서) 열어주는 보헤미안 친구로 등장했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 이 드라마의 설정 때문에 시청자들은 거의 모든 에피소드의 처음에 “생일 축하해, 자기!”라고 외치는 리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이제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그녀와 마주치면 그 대사를 외치곤 한다.
“새로운 현상이다.” 타히니와 과일 잼을 듬뿍 바른 토스트의 마지막 조각을 입에 넣으며 그녀가 말했다. “이 일을 아주 오래해온 기분이지만 내 대사가 유행어가 된 적은 없다.”
사실 유행어를 만드는 데는 큰 관심이 없지만 그녀의 세 살 배기 아들 아폴로는 유행어 따라하기에 재미가 들린 모양이다. “얼마나 수다스럽게 재잘대는지 모른다. 그리고 항상 오늘은 엄마 생일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아폴로는 작년에 태어난 라파엘의 형이다.
현재 리는 자신의 삶을 절묘한 줄타기처럼 느낀다. 가족(그녀가 아는 사람 중에 다섯 살 아래의 자녀가 둘인 사람은 그녀가 유일하다)과 뉴욕의 아파트(그녀는 지금도 LA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어쩔 수 없이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있지만), 연기 경력(그녀는 비밀리에 제작 중인 「러시아 인형처럼」의 두 번째 시즌에 출연할 예정이다), 과거에는 성공한 사례가 없는 유형의 스토리를 스크린에 올릴 기회를 조화시키려 애쓰고 있다. “‘현대 여성’으로 살아가는 요령은 이런 일 저런 일을 한꺼번에 그럭저럭 해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녀가 두 잔째 커피를 후루룩 마시며 말한다.
우리의 만남이 끝나면 리는 남편과 함께 부부상담을 받으러 브루클린에 달려가야 한다(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만 관계 유지 차원의 상담이다). 그다음에는 아폴로와 라파엘을 데리러 가야 한다(“좋든 싫든 내 아이들은 분명히 지금 내 삶의 98%를 차지한다.”). 그다음에는 「코리아타운」 원고를 검토한 다음 지금은 밝힐 수 없는 새 프로그램을 촬영하러 유럽에 갈 채비를 해야 한다. 빡빡한 삶이지만 그녀는 라면을 나르면서 자신이 멋진 역할을 하게 될 드라마를 직접 쓰는 몽상을 하던 시절보다는 할 일이 꽉 찬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 어느 날 그녀는 갑자기 억울한 마음이 들었고, 손 놓고 기다리만 하는 데 지쳐서 자신이 꿈꾸던 역할을 직접 글로 썼다. 이제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을 위해 기회를 열어줄 수 있다. 그녀는 더 이상 한국의 나탈리 포트만을 꿈꾸지 않는다. 그녀는 단 하나뿐인 그레타 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