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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깊이 쌓인 산속에서 한 여자가 긴 목재 스키를 어깨에 메고 막바지 급경사를 힘껏 오르고 있다. 그 너머로 알프스 산의 조각들이 맑고 차가운 하늘을 배경으로 삐죽삐죽 솟아 있다. “하늘, 그리고 자연의 무한함과 얼굴을 맞대다.”라고 샬로트 페리앙이 본인의 입으로 묘사한 1930년대의 이 모습은, 널리 알려진 그녀의 다른 사진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 사진에서는 그녀가 금속관으로 만든 긴 의자에 기대어 우아하게 휴식을 취하며 순백색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데, 이는 휴식과 금욕을 보여주는 계산된 모습이다. 이런 이미지들은 그녀 본연의 모습과 그녀의 모던 디자인의 면들을 한데 묶어 보여주고 있다. 페리앙은 주위의 천연 원자재들을 한껏 즐기며 동료들과 함께 라르 브뤼(l’art brut, 가공하지 않은 예술)라는 것을 발굴하기도 했지만, 쉼터를 짓고 그곳의 사람들에게 위안을 선물하기도 했다. 페리앙이 평생에 걸쳐 디자인한 산속의 휴식처, 그리고 그녀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도시적인 인테리어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나는 이런 대비는 그녀를 다른 모더니스트들과 구별한다.

1927년 파리의 살롱 도톤느에서 페리앙은 초기 작품 중 하나인 “지붕 아래의 바”라는 작은 규모의 인테리어 앙상블을 전시했다. 이 전시에서 혁신적인 프로젝트를 찾을 마음의 준비가 돼 있던 사람들은 페리앙의 작품에서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목격했다. 전시 후보지로 제안된 비좁은 아파트의 다락에서 고군분투하던 많은 프로 디자이너들과 예술가들은 결국 그랑 팔레 미술관의 우아한 전시장으로 장소를 옮겨버렸다. 그러나 니켈로 도금한 바와 높은 의자, 붙박이 축음기, 그리고 상판이 거울인 테이블과 깔끔한 가죽 소파가 놓인 페리앙의 공간은 헐벗은 벽 아래에서 환하게 확장되는 것 같았다. 산뜻한 기하학적 구조와 반사되는 빛은 저 아래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은신처를 만들어주었고, 파리를 덮고 있는 더럽고 혼란한 지붕 위에서 홀로 빛났다. 폴 피에렝은 감탄하며 페리앙이 동료들 사이에 ‘결실로 연결될 불안’의 씨앗을 뿌렸다고 선언했다. 그녀의 인테리어는 파리라는 도시와의 대비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불안정한 전후 경제 속에서 젊은이들의 변화하는 운명을 암시하기도 했다. 아르데코 시기의 동료들은 감히 지적하지 못하고 있던 사항이었다.

이 대담한 프로젝트로 페리앙은 예상치 못했던 찬사를 받았다. “하룻밤 새,” 그녀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무명이었던 나는 하룻밤 사이에 카메라 플래시를 한 몸에 받는 사람이 돼 있었다.” 졸업한 지 2년 만에, 페리앙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안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피에르 잔느레와 르코르뷔지에를 찾아가 자신을 “아틀리에의 가구와 비품을 책임지는 사업 파트너”로 고용해달라고 설득했다. 그들의 초창기 공동 작업 작품 중에 1929년 살롱 도톤느에 출품한 “주택을 위한 인테리어 설비”는 바로 파란을 일으켰다. ‘설비’라는 용어는 인테리어 장식과 건축을 구별하던 전통적인 개념과의 절연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88제곱미터의 아파트 내부는 벽 대신 규격화된 수납 캐비닛들이 꽉 채웠고, 수수한 공간 안에 금속관으로 만든 의자와 유리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더 도발적인 것은, 욕실마저 주거 공간 안으로 섞여 들어와 있다는 점이었다. 식탁 쪽 시야에서 목욕하는 사람을 볼 수 있었고, 그 일부분만을 가려주는 것은 욕실 캐비닛뿐이었다. 일반적으로는 단절됐던 공간을, 한쪽에선 수건이 걸린 타일을 붙인 낮은 칸막이가, 그리고 다른 한쪽에선 침대 옆의 선반이 이어주고 있었다. 이 전시를 둘러본 산업 예술 잡지 『레세코Les Echos』의 비평가 파비앵 솔라는 이 작품을 “숭배하지 않을 수 없는 대담함”이라며 숨 가쁘게 칭찬했다. 어떤 비평가는 그보다는 차분하게 질문을 던졌다. “미래에는, 흥미로운 공간 창조를 위해 집 안의 냄새나 소음은 무시하게 되는 것인가?” 건축사학자 메리 맥레오드는 그들의 공간은 단지 이런 대담한 제안을 던진 것뿐이라고 했다. 세상이 생각하는 보편적인 가정의 개념을 개조해서 사람들이 과거보다 공간과 사치품은 적게, 그러나 자유는 더 많이 누릴 수 있게 하려는 의도라고.

그 후 10여 년간 페리앙은 저비용 주택을 철두철미하게 조사해나갔다. 1931년 작업실을 찾기 위해 독일과 러시아를 여행한 페리앙은 궁핍하고 빈곤한 삶의 현장을 목격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노인들이 사는 공영 주택가를 방문했다. “지금도 등골이 서늘해진다.”라고 페리앙은 그때를 회고했다. “정말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될 것 같은, 생명이라곤 없는 공간이었다.” 모스크바에서는 “온 국민이 텅 빈 가게 앞에서 음식에 대해 상상만 하고 있는 걸” 직접 보았다. 파리로 돌아온 그녀는 르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스위스 파빌리온이라는 건물에 아담하지만 설비가 좋은 학생 기숙사를 만들었고, 구세군 건물 안에는 노숙자들을 위한 도시형 주거 공간을 만들었다. 중산층을 위한 최소한의 주택도 계속해서 만들어나갔다. 1935년, 브뤼셀 만국 박람회에서 페리앙이 감독한 프로젝트 “젊음을 위한 집The House for Youth”은 모더니스트들도 충격을 받을 만큼 혁신적이었다. 지금은 보편화된 직사각형 수납 캐비닛 옆에 그녀의 친한 친구인 페르낭 레제의 그림, 고래의 등뼈, 그리고 다른 ‘발견된 오브제’(주로 일상적인 기성품이지만 미술작품이나 미술작품의 일부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은 오브제)를 놓고, 의자받침과 등받이는 골풀을 쓰고 소나무로 만든 의자를 전시했다. 깜짝 놀란 동료들이 어떻게 이렇게 모던하지 않은 재료를 썼냐고 질문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재료로도 진정성 있게 작업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다.”

“무명이었던 나는 하룻밤 사이에 카메라 플래시를 한 몸에 받는 사람이 돼 있었다.”

이후의 프로젝트들에서 페리앙은 목재로 많은 실험을 했다. 자기가 쓸 식탁과 『스수아Ce Soir』의 편집장이 의뢰한 책상을 만들 때는 공예가이자 “진정한 나무 애호가”인 장 슈타유와 함께 오래된 가구를 재활용한 두꺼운 판을 활용했다. 모서리는 둥글게 갈고 표면에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고 매끈하게 문지르기만 했다. 그리고 “자유로운 형태의 테이블”이라 불렀다. 왜냐하면 그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가구들은 “공간을 장악하고” 대화와 협동을 위한 생산적인 공간을 창조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전쟁 중에는 일본과 인도차이나반도에, 그 뒤로는 브라질에 살면서 대나무, 곡면 합판, 열대 목재로 만든 주택 설비를 개발했다. 그리고 각 소재에서 고유한 특징을 최대한 뽑아내어 “디자인은 소재와 그 활용법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소재, 최소한의 주택, 가구를 통한 공간 장악력에 대한 연구, 그리고 산에 대한 그녀의 애정은 앙드레 투르농이라는 기술자와 함께 작업한 작지만 중요한 프로젝트, 높은 산속, 극한의 환경에 지은 산장에 모두 녹아들었다. 두 사람은 원통형 외부 프레임과 조립식 알루미늄 외장 패널, 그리고 붙박이 합판 가구를 활용했다. 니스를 칠하지 않은 목재 내부 벽은 사람들의 몸과 젖은 장비의 습기를 흡수했다가 다시 내뿜을 것이었다. 지극히 작은 공간(4미터×2미터)임에도 불구하고 여섯 명이 장비를 넉넉하게 보관하고, 대화를 나누고, 요리를 하고, 밖에서 눈보라가 휘몰아쳐도 잠을 잘 수 있었다. 페리앙과 친구들은 이 산장을 193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한 뒤 몽블랑을 마주하고 있는 산마루에 설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페리앙은 메리벨 레잘뤼Meribel Les Allues와 레자르크Les Arcs의 고산지대 리조트를 위한 좀 더 규모 있는 실내 건축설계에 주로 힘을 쏟았다. 메리벨에서는 “재료의 부족함이 나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다.”고 그녀는 말했다. 근처의 샬레(*스위스 산간 지방의 지붕이 뾰족한 목조 주택), 그 지역 목수가 만든 둔탁한 가구, 그리고 편안하지만 이젠 비어 있는 일본의 집에 대한 기억도 모두 상상력에 기여했다. 맥레오드는 자유로운 형태의 테이블, 소나무와 골풀로 만든 의자와 침대, 그리고 붙박이 수납장이 있는 그 산장을 “평온하고, 단순하고, 소박하다.”고 호평했다. 1967년부터 20년간 페리앙은 레자크에 4만 개의 침대가 들어가는 거대한 리조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친구 장 프로베를 포함한 그녀의 팀은 이 프로젝트를 “건축의 실험실”이라 생각했다. 이들의 목표는 사람과 눈과 산이 소통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좁은 공간에 들어갈 인테리어 설비를 광범위하게 실험했다. 대량생산된 욕실들, 통합적 수납공간, 책상과 침대, 그리고 자유로운 형태의 테이블까지. 페리앙은 수수한 방 하나하나가 손님들을 위한 편안한 안식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이 일상의 걱정거리들을 잠시 뒤로하고, 저 멀리 알프스의 얼음 뒤덮인 산등성이들과 그 너머 짙은 파란 하늘의 무한함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랐다. 반생 이전에 젊은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디자인은 소재와 그 활용법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디자인은 소재와 그 활용법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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