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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Arts & Culture

아카이브: 진 스타인

진 스타인은 어퍼웨스트사이드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 온 세상을 초대했고,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의 일화를 아메리칸드림의 감동적인 구술 역사로 탈바꿈시켰다. 애닉 웨버가 뉴욕을 대표하는 위대한 이야기꾼의 삶을 기록한다.

많은 사람들이 진 스타인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테이프 녹음기였다. 투박하고 다소 구닥다리 같은 인상을 주지만 수십 년간 미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그녀가 다룬 주제만큼 다양한 대상을 인터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스타인은 메모장과 펜으로 충분한 평범한 작가가 아니었다. 그녀는 구술 역사라는 형식의 대가였으며 녹음기는 인터뷰 대상자들이 직접 말하는 현대 미국에서의 삶을 철저히 포착하고 수집하는 데 꼭 필요한 도구였다.

“어머니는 인터뷰를 진행하다가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찾았다.” 스타인의 딸 카트리나 밴든 허벨이 뉴욕에서 전화로 말했다. “수줍은 듯 떨리는 목소리 때문에 조용하고 여리다는 인상을 주지만 녹음기를 손에 들었을 때는 두려움이 없었다. 그녀는 끈질기게 질문하고 아름답게 경청했으며, 인터뷰 대상으로부터 정확히 듣고 싶은 대답을 들을 때까지 기다렸다.” 스타인의 집요한 호기심과 카세트 녹음은 암살당한 미국 법무장관 로버트 F. 케네디(「미국의 여정」, 1970년 출판), 워홀의 뮤즈 에디 세즈윅(「에디」, 1982년 출판), 로스앤젤레스의 얼굴을 만든 시민 집단(「에덴의 서쪽」, 2016년 출판)에 대한 포괄적인 구술 역사의 토대가 되었다. 그녀의 저서들은 정치를 언더그라운드 미술계로 확장시켰다. 그녀는 정치와 미술 양쪽에 발을 담그고 있었지만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녹음기가 없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사회적 맥락을 보았다.” 밴든 허벨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어머니가 출신 배경을 벗어나는 수단이었다.”

할리우드 거물의 딸이었던 스타인은 호화롭게 성장했다. 세 살 때인 1937년에 가족은 시카고에서 비벌리힐스의 으리으리한 저택으로 이사했다. 보수적인 공화당원이자 안과 의사에서 연예계의 큰손으로 변신한 아버지 줄스는 거주지를 옮긴 덕분에 자신의 음악 예약 대행사 〈MCA〉의 새 본사가 있는 할리우드의 현란함과 화려함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이 가족 저택은 이 집의 막강한 가장에게 아부하기 위해 모여드는 로스앤젤레스의 영화, 음악, 연극 관계자들의 전설적인 파티 현장이 되었다. 스타인은 어린 시절의 집을 종종 ‘환상의 세계’로 묘사했다. 그녀와 여동생은 “잠옷을 입고 작은 인형들처럼 무릎을 굽혀 밤 인사를 하고” 유모들에 이끌려 침대에 눕혀졌다. 꿈의 나라에서의 삶은 그녀가 원하는 풍족함과 안전함을 제공했지만, 열렬한 민주당원이었던 스타인은 밖으로 나가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기로 했다.

“어머니는 녹음기가 없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사회적 맥락을 보았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어머니가 출신 배경을 벗어나는 수단이었다.”

스타인은 어릴 때 샌프란시스코, 스위스, 뉴욕, 매사추세츠의 학교에 다니다가 1950년대 중반에 파리 소르본 대학에 등록했다. 그녀는 프랑스의 수도에서 인터뷰 기법을 배우고 세계의 지식인 사회를 처음 접했다. 스타인의 첫 인터뷰 대상은 『파리 리뷰』에 실릴 그녀의 불륜 상대 윌리엄 포크너였다. 단도직입적인 스타인의 인터뷰 스타일을 좋게 본 이 문학잡지는 그녀를 창립자 조지 플림턴의 조수로 기용했다. 그녀는 뉴욕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몇 년간 이 일을 계속했다. (플림턴은 스타인의 절친한 친구가 되어 훗날 「미국의 여정」과 「에디」의 편집을 맡는다.) “어머니는 『파리 리뷰』를 통해 자신의 주가를 올렸다. 이 때의 경험은 훗날 『그랜드 스트리트』 작업의 밑거름이 되었다.” 밴든 허벨이 언급한 『그랜드 스트리트』는 1990~2004년에 스타인이 편집한 문학, 시각예술 잡지다. “그녀는 항상 신선하고 강렬하고 흥미로운 소재를 찾아나서는 훌륭한 편집자였다. 『그랜드 스트리트』 역시 구전 역사에 가까웠으며, 그녀가 다양한 목소리를 세상에 알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사생활에서도 스타인은 편집자이자 구술 역사가로서의 직업 정신을 발휘했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으는 것이었다. 그녀는 여러 분야의 친구를 보유한 열정적인 파티 주최자였다. 1990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서 그녀는 이렇게 밝혔다. “서로 다른 세계의 인사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것을 즐긴다. 어찌 보면 뉴욕에서의 내 삶도 그런 식이었다.” 1960년대 초부터 어퍼웨스트사이드의 아파트에서 열린 파티에 가면 시민운동가, 반체제 시인, 아방가르드 예술가는 물론이고 노벨상 수상자나 외교관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초대받은 손님 중에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와 흑표당원, ‘팩토리’ 친구들과 함께 온 앤디 워홀, 고어 비달과 주먹다짐을 일삼는 노먼 메일러 등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스타인은 타고난 수완을 발휘해 손님들을 관찰하고 조정하고 연결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만화가 줄스 파이퍼는 『뉴욕 타임스』에 실린 스타인의 사망 기사에서 “그녀는 서커스 감독이었다.”라고 평가했다. “조용히 처신했지만 공간 속에서 존재감이 빛났다. 그녀는 주의를 끌지 않았지만 파티의 중심이었다.” 그녀의 친구들이 그녀에게서 가장 감탄한 점은 이처럼 과시하지 않는 태도였다. 스타인은 명성을 보고 사람들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식대로 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원했다.

스타인이 집필한 세 권의 구전 역사서 가운데 그녀가 가장 아끼는 책은 「에디」였다. 에디 세즈윅은 당연히도 스타인의 친구였다. 1971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기 훨씬 전부터 세즈윅의 거식증과 약물 남용을 알고 있던 스타인은 1967년에 세즈윅이 실수로 첼시 호텔 방에 불을 지르자 그녀를 딸 웬디의 침실에 데려다놓았다. 세즈윅을 자매처럼 돌본 스타인이 헌신은 그녀가 상류사회의 위태로움을 웬만큼 아는 동병상련의 입장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스타인처럼 세즈윅은 막대한 부를 지닌 뉴잉글랜드 지역 거부의 딸로 태어났다.

「에디」에서 스타인은 자신의 주인공이 부잣집 상속녀에서 비운의 슈퍼스타로 몰락한 원인을 탐구했다. 그녀는 세즈윅의 가족과 친구들을 여러 해에 걸쳐 여러 차례 면담하여 주인공의 짧은 생애와 더불어 젊음, 아름다움, 스타덤에 매료된 1960년대 미국의 큰 그림을 그렸다. 스타인의 작품에서 되풀이되는 주제인 아메리칸드림의 허상은 마지막 저서 「에덴의 서쪽」의 바탕이 되었다. 이 책에서 그녀는 20년 이상에 걸쳐 자신의 가족을 포함해 로스앤젤레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다섯 가문을 인터뷰해 미국의 ‘거짓 약속’을 기록했다. 2017년 4월 30일에 83세의 나이로 자살한 스타인은 1992년의 로스앤젤레스 폭동과 쿠바혁명 직전의 아바나에 대한 기록을 비롯한 미발표 구술 역사서도 여럿 남겼다. 나이가 들면서 그녀의 사교 범위는 점점 줄어들었다. “너무 많은 친구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며 힘들어했다.” 밴든 허벨은 모친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파티를 그만두고 사람들을 일대일로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파티를 그리워했다.” 1955년, 그녀에게 큰 의미가 있었던 포크너와의 인터뷰에서 스타인은 작가에게 가장 좋은 환경은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만약 포크너가 스타인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자신과 같은 구술 역사가가 없었더라면 진즉에 잊혔을 미국의 역사, 문화, 사회의 목소리가 가득한 방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Photograph: Frank Leonardo / New York Post Archives / © NYP Holdings Inc. / Getty Images
    Photograph: Frank Leonardo / New York Post Archives / © NYP Holdings Inc. /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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