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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벌리
글렌 코플랜드

데뷔한 지 반세기가 지난 지금, 「키보드 환상곡」의 작곡가는 차세대 기대주가 되었다.
글 by Sala Elise Patterson. 사진 by Paul Atwood.

 

45년. 캐나다, 미국인 음악가 비벌리 글렌 코플랜드가 무명으로 보낸 세월이다. 그 시기의 시작과 끝은 데뷔 앨범이 발표된 1970년과, 1986년에 카세트 몇 백 개로 처음 발매되었던 『키보드 환상곡Keyboard Fantasies』이 재평가를 받은 2015년이다. 그 긴 세월 동안 글렌 코플랜드는 피자 배달부터 「세서미 스트리트」 음악 작곡, 캐나다의 어린이 프로그램 「멋쟁이 아저씨Mr. Dressup」 고정 출연까지 안 해본 일이 없다.

줄곧 이어온 한 가지 일은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꾸준히 곡을 쓰는 것이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우주 방송국’에서 전송된 가청 방송을 노래로 번역하는 과정이다. 지난 몇 년 사이, 글렌 코플랜드가 만든 천상의 음악이 뒤늦게 조명받기 시작했고, 그의 앨범 『키보드 환상곡』과 『전송: 비벌리 글렌 코플랜드의 음악Transmissions: The Music of Beverly Glenn-Copeland』이 재발매되었다. 뉴욕 MoMA에서 그의 음악회가 열렸고, 그의 창조 여정과 남성으로서의 삶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도 제작되었다. 하지만 76세의 글렌 코플랜드는 영예보다 자신의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의 반응을 직접 확인하는 기쁨이 더 크다고 말한다.

SEP: 어린 시절, 집에서 아버지의 클래식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자랐다고 들었다. 그 밖에 생애 초기에 어떤 음악적 영향을 받았나?

BGC: 어릴 때 18-19세기 유럽의 피아노곡을 들었다. 하지만 내가 열두 살 즈음에 아버지는 주로 재즈 음반을 틀었다. 흑인 빅밴드 음악을 많이 들었다. 나중에는 중국, 인도, 서아프리카 드럼 연주 등 전 세계의 음악을 접했다.

SEP: 1970년대에 당신은 음악을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상업적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해졌다. 그때 기분이 어땠나?

BGC: 20대 후반에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유명한 매니저 빌리 제임스를 만났다. 그는 내가 좋은 조건으로 음반을 내도록 도와줄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음악이 어떤 장르에도 해당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음반 제작이 무산됐다는 소식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 때문에 좌절하지는 않아요. 좌절에 빠져서 시간을 허비하는 건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내 귀에 들리는 음악을 계속 썼다.

SEP: 2015년에 재기한 계기는 무엇인가?

BGC: 일본의 한 신사가 『키보드 환상곡』을 접하게 되었다. 그는 판매할 카세트를 보내달라며 내게 연락했다. 30년이나 어딘가에 처박혀 있던 터라 처음에는 그것들이 어디 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음, 그는 며칠 만에 전부 팔아 치우더니 더 많은 물량을 요구했다. 그것들도 한 주 만에 다 팔렸다. 그 후에는 캘리포니아의 한 회사에서 내 테이프를 가져가서 팔았다. 석 달쯤 뒤에는 몇몇 음반사에서 앨범을 재발매할 수 있겠냐고 문의했다.

SEP: 당신은 자신의 음악을 소리라기보다는 인류와 함께 나누는 철학으로 본다. 많은 사람과 나눌 수 없다고 한탄하지 않고 오랜 세월 꾸준히 작업을 이어왔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BGC: 스물아홉 살 때 시작한 불교 수행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퀘이커 교도로 자랐지만 성인이 된 후에 영적 수행 방법을 찾다가 동양에서 무언가를 얻을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특히 불교에서 대부분의 수행은 침묵이다. 하지만 소리를 낼 수 있는 남묘호렌게쿄를 알게 되었다. 내게 완벽하게 잘 맞았고 퀘이커와 사상적 토대도 비슷했다.

SEP: 『키보드 환상곡』은 〈아타리〉 컴퓨터와 드럼 머신으로 제작했다. 기술이 당신에게 유용했나?

BGC: 내 귀에 소리가 들리면 컴퓨터를 이용해 오케스트라 사운드로 옮겼다. 제작 과정에 나 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참가하지 않았다. 나는 별들의 속삭임처럼 컴퓨터로만 만들 수 있는 소리도 들었다. 이 컴퓨터의 도움으로 나는 어쿠스틱 악기로는 시도할 수 없는 폭넓은 음악을 만들 수 있었다.

SEP: 어린이 프로용 곡을 쓸 때는 음악 스타일을 바꿔야 했나?

BGC: 아니. 그 프로그램에 쓸 곡들도 내 방식대로 썼다. 하지만 아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곡을 만들려고 애썼다. 족쇄에 얽매였다고 느낀 것은 내 음악이 아니라 방송에 출연하는 나 자신이었다.

SEP: 당신이 여자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BGC: 그렇다. 당시에 나는 여성으로 살았고 내가 트랜스젠더라는 사실을 깨닫고도 세상에 알릴 방법이 없었다. 당시에는 퀴어 범주에 드는 사람들에 대해 쉬쉬하는 분위기였다. 이성애자가 아니면 이상한 사람이었다. 동성애자는 지옥에 떨어진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SEP: 당신은 세상을 떠난 후에야 유명해질 거라고 스스로 예견한 적이 있다. 생전에 그런 일이 일어나니 기분이 어떤가?

BGC: 내 작품들이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을 실제로 지켜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 무척 기쁘고 황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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