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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트 룸

circa 1955: American sculptor Alexander Calder of Roxbury uses sheets of tin, steel and lengths of wire for his mobile sculptures. (Photo by Evans/Three Lions/Getty Images)

혼란과 키네틱 아트가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 알렉산더 콜더의 작업실 내부.
글 by Stephanie d’Arc Taylor. 사진 by Evans/Three Lions/Getty Images.

알렉산더 콜더의 작품은 유동적이고 가변적이며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는 우아한 모빌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이 용어를 처음 만든 사람이 콜더다. 마르셀 뒤샹은 이 조각가의 작업실을 방문한 다음 자신의 작업에도 모빌을 적용했다). 금속판에서 잘라낸 이 추상적이고 다채로운 도형은 철사에 매달린 채 다른 금속조각이나 묵직한 구와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 그의 모빌과 장신구, 그림 등의 작품은 추상 그 자체다. 시폰을 입은 무용수처럼 환경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섬세함을 품고 있다. “각 요소는 우주의 다른 원소들과 관계를 맺으며 움직이고 흔들리고 진동하고 왕복한다.” 콜더는 1932년에 이렇게 설명했다.

콜더의 작품이 지닌 절묘한 정밀함은 예술가로 활동하던 대부분의 기간에 작업의 근거지로 썼던 아틀리에의 상태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가 30년간 살았던 코네티컷주 록스베리의 농장 옆, 얼음 창고를 개조한 작업실은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정리 전문가 곤도 마리에가 기겁할 만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온갖 펜치, 망치, 가위가 너무 짧아서 쓸 수 없는 끈 조각과 뒤섞여 작업대 위에 어지러이 널려 있었다. 작품이 완성되면 남은 나무와 금속조각은 작업대 밑으로 쓸려 내려가 그대로 방치됐다. 6미터에 가까운 창문에서 쏟아지는 찬란한 빛이 이 난장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천장에는 해리포터가 마법을 부린 듯 모빌이 맴돌고 있었다.

콜더의 작품에 담긴 유동성과 작업실이 나타내는 명백한 혼란은 그의 성장 과정과 뉴잉글랜드 시골로 이사하기 전의 삶을 되짚어보면 납득할 수 있다. 1898년 예술가 부부의 아들로 태어난 콜더(네 살 때 그는 아버지가 만든 조각상의 모델이 되었다. 그 작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영구 소장 중이다.)는 열네 살이 되기 전까지 가족과 함께 필라델피아, 애리조나, 패서디나, 뉴욕, 샌프란시스코 등으로 옮겨 다녔다. 고등학생 때는 뉴욕과 캘리포니아를 오가며 살다가 뉴저지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서 파나마운하를 거쳐 시애틀로 항해하는 여객선에 정비사로 취직했다.

워싱턴주 애버딘의 목재소에서 성실하게 일하던 콜더는 예술가가 되어야겠다는 소명을 느꼈다. 그는 다시 뉴욕으로 이사했다가 파리로 떠났다. 여러 동료 예술가들이 그랬듯 콜더는 광란의 시대Années folles가 한창일 때 파리에서 자기만의 광란의 시대를 시작했다. 1930년에 피에트 몬드리안의 작업실을 방문했다가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그림에 감명을 받은 콜더는 자신의 작품에서도 기하학적 형태와 원색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궁극적으로 그는 추상작품을 천장에 매달아 자유롭게 흔들리게 하거나 소형 모터로 동력을 공급해 생명을 불어넣었다. 모터로 움직이는 작품인 『우주A Universe(1934)』가 뉴욕 현대 미술관에서 처음 공개되었을 때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40분이나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파리에서 축제를 즐기던 다른 외국인들처럼 얼마 후에는 그곳의 활기에 오히려 에너지를 뺏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파리에서 연애하고 결혼한 아내 루이자 니 제임스(작가 헨리 제임스의 종손녀)와 함께 그는 1933년에 코네티컷으로 이주했다. 그 전까지 콜더는 새로운 자극이 급속도로 밀어닥치는 흥미진진하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지만 코네티컷에서는 상황이 바뀌었다. 루이자와 함께 정착하여 두 딸을 키웠고 록스베리의 농장에서 30년에 걸쳐 자신의 예술을 펼쳤다. 생활은 단순해졌다(그와 루이자는 1955년에 인도로 3개월간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곳에서 그는 조각품 아홉 점과 장신구 몇 가지를 제작했다). 하지만 그를 자극하는 혼돈은 어수선한 작업실에서 계속되었다.

콜더가 자신의 세대에서 가장 뛰어난 조각가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코네티컷 시대 초기부터였다. 이 무렵 그는 모빌을 엄청난 크기로 확대해 그가 스태빌stabile이라 부른 대형 설치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런 작품들은 대번에 유명세를 얻었다. 콜더는 뉴욕 아이들와이드 공항(현재 JFK), 유네스코의 파리 사무소,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 전시할 스태빌 제작을 의뢰받았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방랑벽은 되살아났다. 콜더는 1963년에 코네티컷에서 유럽으로 다시 한번 훌쩍 떠났다.¹ 프랑스 투르 외곽에 두 번째 아틀리에도 마련했다. 그곳에서는 먼젓번처럼 수십년에 걸쳐 잡동사니를 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사진을 보면 그가 사망한 1976년 무렵에는 쓰레기가 록스베리에서와 다름없이 산더미로 쌓였던 듯하다.

(1) 콜더의 유산은 코네티컷 록스베리에 계속 남아 있다. 1975년에 제작한 금속판 조형물 『앙귤레르Angulaire』는 사우스 스트리트에 위치한 공공 도서관인 마이너 메모리얼 라이브러리Minor Memorial Library 부지에 서 있다.

(1) 콜더의 유산은 코네티컷 록스베리에 계속 남아 있다. 1975년에 제작한 금속판 조형물 『앙귤레르Angulaire』는 사우스 스트리트에 위치한 공공 도서관인 마이너 메모리얼 라이브러리Minor Memorial Library 부지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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