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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알 카디리

시시각각 변신하는 당대 일렉트로니카의 별.
글 by Tom Faber. 사진 by Justin Chung. 스타일링 by Natasha Newman-Thomas.

2019년 2월의 추운 밤, 베를린 무대에서 얼터에고 샤니라로 분장한 파티마 알 카디리는 화려하고 거만했다. 영국의 그라임 음악과 페르시아만의 타악기가 혼합된 돌연변이 같은 그녀의 빠르고 즐거운 클럽 음악 위로, 그녀는 독기를 품은 듯이 길고 검은 머리를 휙 넘겼다. 나는 그녀를 가까이 보려고 클럽에 모여든 인파를 헤치고 나아갔다. 그녀의 얼굴은 두꺼운 무대 분장으로 덮여 있었지만, 분명하게 싫증 난 표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 물론 연기였지만, 관객들은 그 음악과 그녀의 도도한 태도에 감탄했다. 그들은 춤을 추면서 피곤과 추위를 모두 날려버렸다. 그녀는 그날 밤 샤니라의 페르소나를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하지만 샤니라의 캐릭터는 그녀가 이끌어가는 음악적 여정에서 하나의 경유지에 불과하다. 그녀는 예리하고 비판적인 사유로 전위적인 클럽 음악을 해석하는 작업을 꾸준히하고 있다. 1981년 쿠웨이트에서 태어난 알 카디리는 베를린 테크노의 성지 베르크하인의 공연에서 뉴욕현대미술관의 전시회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무대로 경력을 쌓으며, 전자음악 장르에서 개념 예술적인 인물로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 이런 지적인 성향 때문에 나는 그녀가 대화에서 정말로 위협적인 태도를 보일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새로 자리 잡은 로스앤젤레스의 집에서 줌으로 만난 그녀는 친절하고 사려 깊으며, 따뜻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린 시절을 묘사하는 그녀의 이야기 중간중간에 목이 쉰 듯한 낮은 웃음소리가 끼어든다. 걸프전의 여파 속에서 성장한 그녀는 거의 바깥출입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내면으로 탈출하기 위한 도구들, 즉 좋아하는 비디오게임, 일본의 애니메이션, 예술가 어머니가 수집한 책 속 화려한 삽화들, 생생한 몽상의 깊은 저장고로 자신을 둘러쌌다. 이러한 기분전환 거리는 후에 단순한 오락을 넘어서서, 그녀의 경력 전반에 걸쳐 질문받고, 재해석되고, 재구성될 수 있는 부적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어린 소녀 알 카디리에게는 그저 쿠웨이트의 타는 듯한 오후를 보내는 데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다. “우리 집은 옥상이 비어 있었어요. 주변의 건물들이 낮아서 광활한 지평선이 보였죠. 저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옥상에 앉아서 CD 플레이어를 몇 시간 동안 들으며 책을 읽거나 공상에 빠지곤 했어요.” 그녀는 이렇게 회상한다.

어린 시절 집에서 발견한 카시오 키보드는 그녀가 처음으로 음악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아홉 살짜리 어린아이였을 때 저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음악을 사용하기 시작했어요. 말은 불편했거든요. 아랍어가 서툴렀고, 영어가 더 편했지만 그래도 영어는 외국어였으니까요.” 알 카디리의 아버지는 국가의 주입식 교육을 피하고자 그녀를 영국 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영국 학교에서는 아랍어를 제2외국어로 가르쳤다. 그녀의 부모는 집에서 쿠웨이트 아랍어를 사용했지만, 이것은 아랍 세계 전체에서 사용되는 전통적이고 문어적인 아랍어와는 상당히 달랐다. 그녀에게는 영어가 더 단순하고 현대적으로 느껴졌지만, 영어는 항상 외래의 것이었다. “저는 제 정체성에 대한 언어적 관계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래서 그런 부분을 음악을 이용해 표현했죠. 음악이 저의 제1의 언어이자 일기가 되었어요.”

1990년 아홉 번째 생일이 지나고 며칠 뒤에, 사담 후세인이 TV에 나와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후세인의 군대는 8월 2일 입성하여 1991년 초 미국이 이끄는 연합군에 의해 밀려날 때까지 쿠웨이트를 점령하였다. 알 카디리의 외교관 아버지와 예술가 어머니 모두 쿠웨이트 저항군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점령에 반대하는 소식지를 발행했고, 이 일로 침략군의 암살자 명단에 오르게 되었다. 알 카디리 가족은 군부의 추적을 피해 번번이 집을 옮겼다. 한번은 쿠웨이트 저항군 회의에 30분 늦게 도착한 그녀의 아버지가 제시간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살해된 것을 발견한 일도 있었다. 후에 그는 바스라의 강제수용소에 약 두 달 동안 갇혀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처형당할 뻔한 적이 너무 많아요. 정말이지 아직 살아계시는 게 이상할 정도예요.”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가 새 비디오게임을 하러 친구 집에 가있는 사이에 아버지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녀는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고 처음 몇 달 동안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이 행복했다.

22년 후 그녀의 음악적 돌파구인『데저트 스트라이크』 EP 음반은 어린 시절의 순수함과 전쟁의 실상 사이의 대비를 다루고 있다. 이 제목은 침공이 일어난 지 얼마 안 돼 출시된 비디오게임에서 따왔다. 게임에서 플레이어들은 헬리콥터를 타고 페르시아만에 있는 이름 없는 국가 위로 비행하며 혼자서 테러 집단을 격퇴하는 미국인 조종사 역할을 맡는다. 어린 알 카디리는 자신이 최근에 경험한 충격적인 역사가 게임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렸다. “저는 그 게임을 증오했어요. 전쟁 직후에 그런 게임을 출시하다니 너무 사악한 짓이었죠. 음악은 없고 헬기의 윙윙거리는 소리와 폭탄의 효과음만 있었던 것이 기억나요. 저는 마치 가상현실에 연결된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내가 뭘 보고 있는 거지? 사람들이 이걸 재미로 하는 거야? 이건 미친 짓이야.”

그녀의 EP 음반은 이 음악 없는 게임을 위해 상상한 사운드트랙으로, 군악 같은 리듬과 가공되지 않은 제작 방식, 격앙된 에너지로 유명한 영국 힙합의 변형인 그라임을 끌어왔다. 알 카디리의 해석은 더 신중했고, 풍부한 선율에 개인적, 문화적 트라우마에 대한 복잡한 생각들이 가득 차 있었다. 섬광처럼 빛나는 신시사이저 소리는 초기 비디오게임의 사운드트랙을 환기하며 음악의 영감이 된 공포를 가리킨다. 하지만 이 음반은 클럽 음악의 컬렉션으로서도 훌륭하다.

“제가 그 게임을 했을 때 최초의 실존적 감정이 일었어요.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그 감정을 표출하려고 음반을 만들게 된 거예요.”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대학 진학을 위해 열일곱 살에 미국으로 이주한 알 카디리는 『데저트 스트라이크』를 발표했을 때도 미국에 살고 있었다. 그녀는 마이애미 대학교에서 작곡을 공부하면서, 열아홉 살에 음반 스튜디오와 인연이 닿았다. 초기에 발표한 곡들에는 현대적인 클럽 사운드에 고향에서 가져온 소리의 질감이 스며들어 있다. 아이셰이라는 이름으로 발매된 『Muslim Trance Mix』에서는 엄숙한 드럼과 합성된 합창 위에 이슬람의 종교의식 음악을 샘플링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보컬로 구성된 또 하나의 아이셰이 음반이 뒤를 이었고, 이후에는 클럽에 초점을 맞춘 『Genre-Specific Xperience』 EP의 트로피컬 사운드가 등장했다.

그러나 2012년 알 카디리에게 음악계의 명성을 가져다준 것은 『데저트 스트라이크』였다. 이를 통해 15년 넘게 진보적인 전자음악의 선봉에 서온 영국 레이블 하이퍼덥의 관심을 끌어, 네 장의 앨범을 발표하게 되었다. 그녀는 주류 아티스트들을 위한 프로듀싱과 ‘팝 음악’을 요청받았지만, 아직 수락하지 않았다. “저는 그냥 팝에 맞지 않아요.” 그녀가 조용히 웃으며 말한다. “아시잖아요. 저는 언제나 컬트적일 거예요, 영원히.”

그녀의 정규 앨범 데뷔작인 2014년의 『아시아티쉬Asiatish』 또한 지적인 틀을 가지고 있다. 대학에서 공부한 한시에 대한 애정과 쿵푸 영화에 매료된 우탱 클랜에서 런던의 ‘시노-그라임’ 제작자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선율과 악기를 참고한 미국과 유럽의 흑인 음악가들에게 영감을 얻은 그녀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상 속 나라 중국에 대한 자신만의 찬가를 만들었다.

그녀는 음악 소프트웨어에 기본으로 들어 있는 ‘아시아’ 사운드 키트를 이용해 밝은 멜로디와 드럼으로 구성된 아름다우면서도 낯선 음악을 만들었다. 이런 발상은 「레이디와 트램프」부터 중국은 싸구려 모조품의 본고장이라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중국 문화에 대한 인종차별적 고정관념을 살펴보는 기능을 한다. 오프닝 트랙은 합성된 거룩한 목소리의 합창이 뒷받침해주는 가운데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어로 부르는 「Nothing Compare 2 U」를 전면에 내세운다. 긴장되고, 가느다랗고, 묘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곡이다. 알 카디리의 음악은 그 자체의 디지털적인 특성에 천착하면서 저마다 아찔한 거울의 방을 열어놓는다.

이와 같은 주제가 2015년 초, 쿠웨이트에서 무릎을 다쳐 침대에 누워 지내던 알 카디리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지구의 절반쯤 떨어진 볼티모어에서 일어난 시위를 지켜보았다. 경찰에 구금된 스물다섯 살 흑인 남성 프레디 그레이의 사망이 촉발한 것이었다. 불과 얼마 전에도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경찰관 대런 윌슨이 마이클 브라운에게 치명적인 총격을 가한 사건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알 카디리가 미디어의 렌즈를 통해 경험한 폭력은 정치적인 그녀의 성향에 불을 붙였다. 어느 정도는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기질이었다. 이는 또한 그녀가 미국에 온 후 처음 참가했던 시위를 되돌아보게 했다. “미국에 도착해, 1999년 9월 워싱턴 D.C.에서 세계무역기구와 세계은행에 반대하는 시위가 잔인하게 진압되는 장면을 보게 되었어요.” 이 사건은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기대했던 나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저는 순진하게 눈이 휘둥그레진 채 미국이 진보적인 국가라고 생각하며 여기에 온 거예요. 평생 미국의 빌어먹을 민주주의 선전을 주입받아왔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어마어마한 경찰의 존재가 있는 거예요. 저는 이 나라에서는 반대할 수 있다고, 집회의 자유가 있다고 그저 맹목적으로 믿어왔다는 걸 알았죠.”

( above )
알 카디리가 LA에 있는 귀금속 매장 <어거스트>에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빈티지 목걸이와 팔찌, 그리고 앨리스 치콜리니의 반지를 착용하고 있다.

알 카디리의 부모가 언론의 자유 못지않게 중요하게 가르쳐온 저항의 권리는 2016년에 발표한 차기 앨범 『브루트Brute』의 주제가 되었다. 표지에는 폭동 진압 복장을 갖춘 텔레토비가 등장했다. 음악적으로는 그녀의 이전 곡을 들었던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익숙했겠지만, 이번 앨범은 유리 깨지는 소리, 총성, 그리고 책임 없는 미국 경찰 체제에 대해 말하는 전직 로스앤젤레스 경찰국 경사 셰릴 도시의 목소리 샘플로 차별화되었다.

나는 일렉트로닉 음악계에서 발매하는 음반마다 이렇게 엄격한 주제적 틀을 갖춘 아티스트가 얼마나 드문지 짚고 넘어간다. 알 카디리가 웃으며 말한다. “그래요, 제 아이디어는 비교적 정교해요. 저는 음반마다 작은 선언을 내놓았어요.” 그런데도 그녀의 음악은 개념의 무게에 좀처럼 짓눌리지 않는다. “사람들이 음반 뒤에 깔린 제 생각을 읽는 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들은 이 앨범을 좋아하거나 좋아하지 않겠죠. 궁극적으로 그 관계는 음악과 맺어지는 거니까요.” 그녀는 말한다.

내가 알 카디리의 공연을 처음 보았던 2019년 겨울밤, 그녀는 음악과 개념을 완벽하게 결합했다. 그녀는 2000년대 아랍 팝 디바들과 퀴어 운동 분야에 있는 친구들에게 영감을 받은 페르소나와 미학을 특징으로 한 2017년 음반 『샤니라』의 곡들을 공연하고 있었다. “이 여성들은 드래그 퀸 못지않게 화장을 진하게 한 이성애자들이었어요. 저는 드래그와 아닌 것 사이의 경계, 그 극단적 여성성을 이용하고 싶었어요. 샤니라는 누구라도 구현할 수 있는 페르소나예요. 그녀는 사악한 여왕이고, 기가 막히게 멋지죠.”

그녀의 음반 중에서 가장 느슨하면서도 활기찬 이 음반은 쿠웨이트의 퀴어 친구들과 공동작업으로 만들어졌으며, Grindr(성소수자들을 위한 소셜 네트워킹 앱) 대화에서 인용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곡들의 초안을 들은 어머니는 그녀가 너무 멀리 갔으며, 보수적인 쿠웨이트 사회에서 문제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저는 음반에서 지나친 부분은 삭제해야 했어요.” 알 카디리는 이렇게 말한다. 『샤니라』가 발표된 뒤에 아랍 세계 곳곳의 친구들이 퀴어 파티에서 그녀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들의 영상을 보내주었다. “그건 제가 이 음반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에요. 여자아이들이 제 음악을 듣고 있었던 거예요!”

알 카디리는 아버지가 외교관으로 근무했던 세네갈의 다카르에서 태어났고 두 살 때 가족과 함께 쿠웨이트로 돌아가, 그곳에서 자랐다. 그녀는 태어난 나라에 다시 간 적은 없지만, 프랑스계 세네갈인 감독 마티 디오프가 자신의 데뷔작인 「애틀랜틱스」의 음악을 부탁했을 때는 단순한 우연 이상의 느낌이 들었다. 다카르를 배경으로 한 낯설고 몽롱한 이 영화는 2019년 칸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알 카디리의 사운드트랙은 가장 부드럽고 섬뜩한 음악을 선보이고, 웅웅거리는 베이스는 디오프의 길고 모호한 바다 장면에 울려 퍼진다. “그 기회는 제 인생을 정말로 바꿔놓았어요. 영화음악을 하는 건 제 평생의 꿈이었거든요.”

그녀는 그렇게 새로운 프로젝트를 찾아다니며, 작업마다 매혹적인 아이디어의 프리즘과 독특한 소리를 위한 캔버스를 만들어낸다. 2021년 초에 발매된 최신 앨범 『중세의 여자M edieval Femme』에 대해 물었을 때, 나는 그녀가 다시 한번 유년기의 주제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집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던 열한 살 무렵, 그녀는 학교에 갈 수도, 침대에서 일어날 수도 없을 정도로 심각한 우울감에 빠져 있었다. “그때는 현실에서 도피하려고 극심한 공상에 빠져들기 시작했어요. 저는 ‘좋아, 난 퇴학 당할 거야.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겠어.’ 뭐 이런 상태였어요. 그래서 하루 종일 공상에 빠져서 고통을 모른 척한 거죠. 그때 저는 정교하게 꾸며낸 시간 여행으로 중세의 판타지를 상상했는데, 그 속에서는 제가 남자가 되곤 했어요. 쿠웨이트에서 남성 중심적인 사회의 여자로 자라다가, 열한 살이 되었을 때 이 문화에서는 여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단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죠.”

알 카디리는 후에 여성들이 쓴 고전 아랍 시집을 읽으면서 발견한 관능과 때로는 노골적으로 드러난 성욕에 깜짝 놀랐다. 이는 오늘날 대부분의 아랍 세계에서 여성의 성욕을 금기시하는 풍조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저는 지극히 우울한 갈망을 감지했어요. 이 여성들은 정말 많이 원했거든요. 거의 모든 시가 이루어지지 않는 요구와 요청, 욕구와 같았어요. 덕분에 욕망과 우울의 관계에 대해서, 그 둘이 내 삶에서 어떻게 겹치는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죠. 저는 우울을 욕망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정말 많이 원하기 때문에 움직이거나 제대로 활동할 수도 없는 상태로 보기 시작했어요.”

그녀의 공상과 시 독해는 이슬람 정원의 백일몽을 거니는 것을 상상하는 『중세의 여자』(알 카디리는 이 앨범을 ‘그녀’라고 지칭한다)로 결합되었다. 이 음반은 『샤니라』의 소리에서 벗어나 아랍과 유럽 양쪽의 중세음악과 유사하게 신시사이징한 음악으로 향한다. “이 앨범은 우리를 사로잡아, 욕망과 우울, 고통, 그리고 감각적 갈망이 일치하는 곳으로 데려가는 분위기에요.” 그녀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런 점은 최근 그녀의 어떤 작품에서보다 더 두드러지는 알 카디리 자신의 애처로운 보컬과 더불어, 하품과 멜로디 사이의 빈 공간으로 대체된 리듬의 결핍에서 모두 들을 수 있다.

이 음반의 인상적인 커버는 알 카디리의 어머니 투라야 알-박사미의 작품에서 가져온 것이다.「메시지 1」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1990년, 쿠웨이트 침공 2주 전에 그려졌다.1 그림에는 짙은 남색을 배경으로 수수께끼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가 있다. 머리 위에 먹구름이 몰려드는 사이 새 한 마리가 그 여자에게 메시지를 전해준다. “엄마는 나쁜 예감을 느꼈어요. 사실 우리 엄마는 귀신처럼 운세를 맞히거든요. 제가 쿠웨이트에 갈 때마다 엄마는 커피 찌꺼기로 운세를 점쳐요. 이 그림에서 저는 여자의 얼굴에 반했어요. 그녀의 눈에는 홍채가 없어서 절대 접근할 수 없을 것같이 보이잖아요. 우울감에 빠진 사람이 그렇거든요. 마치 껍데기 같아요. 사람이 있다는 건 알지만, 닿을 수는 없어요.”

앨범을 만들면서 알 카디리는 4년 동안 머물렀던 베를린을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다. 이사한 첫해에는 코로나19 대유행으로 고립된 채 시간을 보냈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자신의 성격을 “집고양이처럼 무척 게으르다”라고 표현한 그녀는, 그 덕분에 집에서 복고풍 비디오게임을 하는 것에 만족했다고 한다. “비디오게임은 저를 유년시절과 이어주거든요. 그냥 잠옷을 입은 채 과일 주스를 마시면서 사탕을 미친듯이 많이 먹고 싶어요. 뱃속 아기처럼 몸을 웅크리고 게임을 하던 좀 더 순수했던 시기로 돌아가고 싶은 거예요.”

그녀는 정원이 있고 모퉁이를 돌면 산책로가 나오는 새 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조용하고 숲이 우거진 교외 지역이에요. 생전 처음 보는 나무와 꽃이 있는 언덕에 둘러싸인 예쁜 멕시코 동네인데, 초록이 우거지고 아름다워요. 어쩐지 운명인 것 같아요.”

알 카디리는 운명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다. 어머니가 쿠웨이트 침공 며칠 전에 불길한 징후가 보이는 그림을 그린 것은 운명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태어난 도시 다카르에서 촬영한 영화의 음악을 만들게 된 것도, 정원을 산책하는 내용을 담은 앨범을 발표하는 시점에 자연에 둘러싸인 새 집에 도착하게 된 것도 모두 운명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키타박 막투브”라는 아랍어 표현을 사용한다. 당신의 책은 이미 쓰여 있다는 뜻이다.

나는 그녀에게 “운명”이 어떤 의미인지 물어본다. “운명은 우리를 우리 인생의 경로로 이끌어가는 환경이에요.”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그렇다면 그녀는 인생에서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없다는 뜻일까?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말한다. “선택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선택은 여전히 같은 길로 우리를 데려가죠. 자유의지는 매일의 현실이고, 운명은 장기적인 길인 셈이에요.”

“저는 음악가가 되는 것이 제 운명이라고 믿어요.” 그녀가 단호하게 말한다. 그녀의 인생에서 음악은 모국어이자 기억의 저장고이고, 아이디어를 표면화하며 파고들 수 있는 공간으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녀의 인생은 다른 길로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작곡을 그만두는 날은 제가 삶의 의욕을 잃었거나, 극심한 관절염에 시달리거나, 어쩌면 더는 멜로디를 흥얼거리지도 못할 정도가 됐을 때일 거예요. 오직 죽음만이 제가 음악 만드는 걸 막을 수 있을 테니까요.”

(1) 알 카디리는 그 당시 가족에게 가해진 끊임없는 위험을 드러내주는 한순간을 회상한다. “한번은 칼라슈니코프 자동 소총을 가진 열일곱 살짜리 아이가 검문소에서 우리 엄마를 가로막았어요. 그리고 엄마 차를 수색하다가 카메라를 발견했어요. 거기에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진들이 들어 있었고, 그건 사형을 받을 수도 있는 범죄였어요.” 그녀의 어머니는 재빨리 머리를 써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엄마는 ‘날 신고하지 않으면 이 모든 상황이 끝나고, 널 파리로 데려가줄게. 약속해.’라고 말씀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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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킨포크 42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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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알 카디리는 그 당시 가족에게 가해진 끊임없는 위험을 드러내주는 한순간을 회상한다. “한번은 칼라슈니코프 자동 소총을 가진 열일곱 살짜리 아이가 검문소에서 우리 엄마를 가로막았어요. 그리고 엄마 차를 수색하다가 카메라를 발견했어요. 거기에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진들이 들어 있었고, 그건 사형을 받을 수도 있는 범죄였어요.” 그녀의 어머니는 재빨리 머리를 써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엄마는 ‘날 신고하지 않으면 이 모든 상황이 끝나고, 널 파리로 데려가줄게. 약속해.’라고 말씀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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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킨포크 42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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