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코르뷔지에와 샬로트 페리앙 등 다른 모더니스트의 작품을 거래하는 골동품 거래상 투샬룸이 마르텔 호텔에 매장을 연 것은 매우 적절한 선택이다. 르 코르뷔지에와 페리앙은 둘 다 보수적인 ‘실내장식 예술가의 사회Société des Artistes Décorateurs’를 벗어나기 위해 말레스테방이 선도한 모임 ‘현대미술가 연합Union des Artistes Modernes’의 창립 멤버였다. 1925년 파리에서 열린 아르데코 전시회에서 값비싼 사치 공예품을 전시한 동료들에 경악한 그들은 장식보다 기능을 중시하고 유리, 시멘트, 금속 같은 산업용 자재를 사용하여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혁신적인 프로젝트를 시작하겠다고 서약했다.
그럼에도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해 부유한 고객만을 상대한 말레스테방은 엘리트주의를 이유로 비판받았다. 건축사학자 리처드 베체러에 따르면, 가장 아픈 공격은 한 은행가의 의뢰로 말레스테방 거리가 개장된 이후에 나왔다. “호화로움과 규모를 강조하여 구상한 건물은 오늘날 건축 역사에서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한다.” 스위스의 비평가 지그프리트 기디온은 1927년에 이토록 냉혹한 평가를 내렸다.
그러나 마르텔 형제의 집은 건축가의 접근 방식이 기디온의 평가보다는 기능적이었음을 증명한다. 작업실과 아파트는 실용성을 염두에 두고 설계되었다. 큰 미닫이문을 통해 조각품을 작업실 안팎으로 운반할 수 있었고 테라초 바닥은 쉽게 씻어낼 수 있었다. “마르텔 호텔은 예술가를 위해 설계되었다.” 〈갈레리 54〉의 웹사이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정확히 말해 점토, 석고, 석재로 작업하는 조각가를 위한 건물이다. 건물의 모더니티가 급진적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미니멀한 산업적 미감을 반세기 전에 예측한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베체러의 지적대로 말레스테방이 미감에 초점을 맞춘 것은 소박함을 추구하던 동시대 예술가들의 신경에 거슬렸을 가능성이 있다. 디자인과 장식 등 다양한 분야의 통합을 추구하는 빈 분리파Viennese Secession의 입장에 큰 영향을 받은 말레스테방은 예술 형식을 넘나드는 작업을 통해 이름을 날렸다. 〈발리〉 구두와 〈알파로메오〉 자동차 등 기업의 모더니즘풍 매장 인테리어를 맡았고 패션 업계에도 관여했다. 이런 행보는 기존 예술가들이 속한 전통적인 예술계와 충돌했다. 진정한 현대 예술 매체는 영화밖에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진 그는 영화 촬영 세트도 설계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배우와 엔지니어 사이의 애증을 그린 마르셀 레르비에의 무성영화 「무정한 여인」이다. 그의 초현대적 장식은 등장인물의 심리 상태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말레스테방의 영화적 시각은 마르텔 호텔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바닥과 천장에 붙은 두 개의 거울을 감싸는 나선형 계단은 위아래로 무한히 이어지는 듯한 인상을 준다. 아방가르드 금속 장인 장 프루베가 디자인한 스테인리스스틸 문손잡이부터 루이 바릴레가 제작한 층계 상단의 스테인드글라스까지, 믿을 만한 예술가들과 협력한다는 건축가의 철학도 반영되어 있다. 마르텔 형제를 좋아하는 투샬룸은 그들의 작업실 위층에 살면서, 벽에 원래와 가까운 색을 칠하는 등 장의 아파트와 작업실을 최대한 원상복구 했다. 그는 자신과 같은 골동품 상인들은 값진 예술 작품이 보물로 인정받기 전부터 거래를 통해 보전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항상 그것이 내 임무이자 내가 하는 일의 가치라고 느꼈다.”
마르텔 호텔은 말레스테방이 사망한 지 30년이 지난 1975년에 건축가의 유산을 발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프랑스의 역사 기념물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그곳을 지나가는 대부분의 행인들에게 그의 이름은 익숙지 않겠지만, 디자인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집약된 파리의 골목은 이제 프랑스 모더니티의 핵심 인물을 기리려는 애호가들을 끌어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