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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요바노비치:
디자인 왕족을 위한 성

피에르 요바노비치의 디자인 전시장은 10년을 넘게 산 그의 집이기도 하다. 애닉 웨버가 캐슬로 들어가는 열쇠를 가진 남자를 만난다.
사진 by Romain Laprade.

드넓은 샤토 드파브레구아의 구석구석을 개조하는 데 수년이 걸렸지만 피에르 요바노비치가 자신의 시골 저택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는 부분은 실내장식이 아니다. 프랑스 남부에 자리 잡은 이 집에서 지낼 때 그는 야외에서 주로 시간을 보낸다. 종종 세 마리의 목양견을 데리고 집 밖으로 산책을 나가는 그는 작은 별채 예배당을 지나 루이 베네시가 설계한 주목나무의 미로를 통과하며 아침을 시작한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가 닭에게 모이를 주거나 정원 일을 한다. “나는 좀 예민한 사람이지만 정원에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성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사무실에서 그는 우리와 화상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세상과 연결을 끊고 몽상가가 되는 곳이다.”

그가 운영하는 스튜디오는 유럽과 미국 전역에서 40개의 프로젝트를 활발하게 진행 중이고, 그에게는 지금 휴식이 필요하다. 우리와 전화 통화를 할 때, 55세의 요바노비치는 타운 하우스 보수 작업을 지휘하던 런던에서 유로스타를 타고 집에 막 도착한 상태였다. (역시 그의 사무실이 있는) 파리와 뉴욕의 본사와 프로방스의 자택 사이를 정기적으로 오가는 사람 치고, 1970년대 이브 생 로랑 풍의 두툼한 안경을 쓴 그의 얼굴은 놀랄 만큼 동안이었다. 스튜디오를 설립한 2001년 이후, 요바노비치는 미쉐린 스타 셰프 엘렌 다로즈, 억만장자 사업가 프랑수아 앙리 피노, 슈즈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루부탱 등이 의뢰한 호텔, 레스토랑, 미술관, 사무실 및 부티크 인테리어뿐만 아니라 수많은 개인 주택을 완성했다. 순수주의 감성, 장소특정적 예술, 맞춤형 빈티지 가구를 혼합한 그의 확고한 현대적 스타일은 화려한 장식이 아니라 절제된 럭셔리로 정의되는 새로운 프랑스식 디자인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요바노비치는 하이엔드 패션을 통해 디자인의 길을 찾았다.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1990년대 초에 〈피에르가르뎅〉 남성복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매우 의미 있는 시기였다.” 그가 말한다. “가르뎅은 볼륨과 비율의 대가였다. 그는 옷을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8년간 그 회사에서 일하면서 갈수록 더 많은 디자인을 책임졌지만 요바노비치는 자신이 다른 세상에 속한다고 느꼈다. “창작 과정은 어릴 때 끊임없이 그리던 상상 속 아파트 디자인을 연상시켰다.” 다른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래밭에서 홀로 그림을 그리는 요바노비치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가르뎅과 함께 하는 일을 사랑했지만 결국 내 열정은 다른 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의 스타일은 여전히 나의 작품 속에 살아 있다. 그는 대칭과 실루엣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드레스의 재단, 색상 및 형태에 따라 누군가의 키를 크거나 작게 보이게 할 수 있다. 공간도 마찬가지다.” 두 분야의 많은 유사점을 인식하면서도 요바노비치는 몇 가지 변화를 고심해야 했다. “패션은 창작에 유연성이 더 크다. 드레스는 1~2년을 입지만 집은 훨씬 오래간다.”

실내 건축 사업체를 설립하고 20년 동안 요바노비치는 디자이너 의상을 만들던 자신의 경험을 절대 망각한 적이 없다. 그는 패션 디자이너가 옷을 만들 때 적용하는 맞춤형 접근 방식을 인테리어에 적용하면서 이름을 알렸다. 자수, 레이스 제작, 재단 전문가의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의상 디자이너처럼, 요바노비치는 그의 회사가 함께하는 장인 수십 명의 수완에 의지한다. “다들 가족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가 말한다. “15년간 같은 목수, 도예가, 유리 공예가와 협업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단순한 재료를 오래가는 작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전문가들이다.” 다 쓰러져가는 ‘도우로 밸리 와이너리’를 세련된 ‘퀸타 다 코르테 게스트 하우스’로 변신시키는 프로젝트를 맡은 2018년에 요바노비치는 지역 전문가로 팀을 꾸려 아줄레주 타일, 흰 토담, 손으로 그린 프레스코화로 확실한 포르투갈풍 공간을 완성했다. “손님들이 자신들이 묵는 지역을 고스란히 느끼기를 바랐다.” 그가 말한다. 물론 비용과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작업 방식이 분명하다. 요바노비치의 방식은 규모를 키우는 것이 아니다.

그는 최고 수준의 현대 수공업자들을 중앙 무대에 진출시킨 동시에, 특히 20세기 빈티지 가구를 적극적으로 사용해 과거에 대한 경외감을 드러냈다. 요바노비치는 1920년대 아르데코의 한 갈래인 스웨디시 그레이스Swedish Grace의 열렬한 수집가다. 그 대표 디자이너인 악셀 에이나 요트의 전시회 배경을 설계하면서 발견한 취향이다. 그의 프로젝트에는 에이나 요트의 소나무 흔들의자, 파보 티넬의 전등, 군나르 아스플룬트의 식탁 의자 등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가구가 빠지지 않는다. 테디베어 귀가 달린 안락의자를 포함한 요바노비치의 가구 데뷔 컬렉션 〈OOPS〉에도 비고 보에센이 1930년대에 디자인한 부드러운 양가죽 의자의 느낌이 살짝 묻어난다. “이런 이름들은 대부분 수집가들에게 생소하다.” 그는 잘 알려지지 않은 스칸디나비아 디자이너들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작업을 의뢰받으면 경매장과 골동품상을 물색해 적합한 가구부터 찾기 시작한다. 좋은 가구는 구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유를 부릴 수 없다.” 그가 실내장식용으로 선택하는 미술품도 마찬가지다. 당대의 데미언 허스트보다는 클레르 타부레, 빌헬름 사스날처럼 완전히 두각을 드러내지 않은 인재를 선호한다.

요바노비치가 장인, 아끼는 예술가, 가구 디자이너를 총동원한 프로젝트가 바로 ‘필생의 역작’인 800제곱미터 면적의 샤토 드파브레구아다. 하지만 2009년에 어느 잡지의 부동산 광고에서 프로방살 샤토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해도 그는 시골 저택을 구입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니스 인근에서 성장한 그는 직업적인 호기심으로 그곳을 방문했다. “구조는 완전히 무너졌지만 17세기 건축의 소박함에 매료되었다.” 그의 설명이다. “18세기의 그랜드 샤토와는 달리, 이 궁핍한 시대의 사람들은 장식을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취향대로 자유롭게 뜯어고칠 수 있었다.” 3년에 걸친 대대적인 수리를 거쳐 요바노비치와 장인 팀은 수도원 같은 소박한 집을 만들었다. 석회암 바닥부터 조각된 천장에 이르는 과거의 흔적은 요바노비치의 미장이 조엘 퓌제의 손으로 세심하게 복원되었다. “내 역할은 서로 판이하게 다르지만 열정만은 우위를 가릴 수 없는 관현악단의 지휘자와 비슷하다.”

“항상 바꾸고 싶다… 공간, 조명, 특정 의자를 놓을 위치를 고민하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전반적으로 디자인을 최소화했지만 샤토에는 독특한 요소들이 가득하다. 거실에는 다양한 국가와 시대의 작품들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 주문 제작한 리넨 소파가 스웨디시 그레이스 참나무 벤치와 나란히 놓여 있고, 오래된 벽토 벽난로가 프란체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의 퍼즐 같은 수채화를 보완한다. 의외의 조합이지만 실제로 사람이 사는 공간 같은 느낌을 준다. 새새틈틈 치밀하게 설계하면서 요바노비치는 자신의 집이 쇼룸처럼 보일까 봐 우려했을까? “아니, 절대 아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좋아하는 요소가 모두 담긴 행복한 집, 살면서 어수선해지기도 하는 집이다. 우리는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때로 집에서 춤을 추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집은 내 개성을 반영한다.”

요바노비치의 현대미술 컬렉션이 없다면 샤토 드파브레구아는 지금 같은 집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내부에는 미국의 조각가 리처드 노너스Richard Nonas와 프랑스계 중국인 화가 옌 페이밍의 작품이 놓여 있고, 정원은 행성계에서 영감을 받은 알리시아 크바데의 설치 작품이 차지하고 있다. 그가 가장 애호하는 작품은 클레르 타부레의 프레스코화로, 샤토 예배당 전체를 덮고 있어 완성하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면 85명의 어린이가 당신을 응시하는 벽화를 볼 수 있다. 굉장히 강렬한 작품이다.”

샤토 드파브레구아는 결코 완성되지 않으리라는 점에서 요바노비치의 여타 프로젝트와 다르다. 고객이 의뢰한 프로젝트는 일반적으로 열쇠를 넘기는 순간에 마무리되지만, 자신의 집을 설계하는 것은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는 과정이다. 일정표나 마감 기한이 없기 때문에 특히 완벽주의자인 요바노비치로서는 그 방대한 프로젝트를 끝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항상 물건을 바꾸고, 방을 다시 칠하거나 가구를 옮기고 싶다.” 그가 말한다. “공간, 조명, 특정 의자를 놓을 위치를 고민하느라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10대 때부터 그랬다. 내 침실의 가구 배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나를 둘러싼 아름다움에 늘 집착했다.” 미술에 대한 관심은 깊지만 정식 디자인 교육은 받은 적 없이 독학을 한 사람으로서 그는 경향이나 유행보다는 자신의 직감을 따른다. “학위를 지닌 디자이너들에 비해 나는 원하는 것을 더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이 대체로 이런 자유분방함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요바노비치의 특기는 화려한 겉치레를 지양하고 부드러운 선과 자연 소재로 다듬어진 조화로운 부피감을 만드는 데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취향에 한 가지 변한 점이 있다면 바로 색이다. 그는 초창기의 백색 미니멀리즘에서 벗어났다. 샤토 드파브레구아에서는 건물의 규모를 강조하기 위해 무난한 바탕에 노란색, 짙은 녹청색, 갈색으로 장난스러운 악센트를 주었다. 자신의 맞춤형 접근 원식에 충실하기 위해 그는 각 프로젝트마다 맞춤형 색조를 만들고 조합 페인트는 절대 쓰지 않는다. “어쨌거나 나는 남부 출신이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우리는 빛, 색, 재미를 좋아한다. 곳곳에 컬러를 추가하면 건축물이 산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흥미로워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19년 빌라 노아이유 기념품 가게 리모델링에서 그는 어느 때보다 남프랑스의 뿌리와 가까워졌다. 코트다쥐르의 로베르 말레 스티븐스Robert Mallet-Stevens이 설계한 건물 내부에 위치한 미술관 상점은 이제 연주황 천장과 샛노랑, 청록, 적갈색이 혼합된 벽이 새하얀 입체파 외관에 뿌려진 강청색과 강한 대조를 이룬다.

대담하게 강조된 색상에서든 폭넓은 가구의 조합에서든, 요바노비치의 최근 작품에는 국적인 순간들이 더 자주 등장한다. 인테리어를 극적으로 구성하는 경향은 그가 주된 영감의 원천으로 꼽는 오페라와 무대 디자인에 대한 열정을 드러낸다. “오페라 무대는 작품의 영혼, 음악, 등장인물을 반영할 때 가장 효과적이다.” 그가 설명한다. “내가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공간마다 고객이나 지역에 어울리는 새로운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마침 요바노비치는 최근 바젤에서 베르디의 1851년작 「리골레토」 오페라 무대 디자인을 의뢰받았다. “꿈이 이루어졌다.” 그가 말한다. “나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언젠가는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어왔다.” 예상대로 요바노비치는 작품의 영혼을 존중하는 동시에 21세기 관객에게 공감받을 수 있는 디자인을 구상 중이다. 옛것과 새것을 결합해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것. 바로 그가 샤토 드파브레구아에 구현한 성과다.

    요바노비치의 샤토에서는 유명한 예술가와 슈테판 발켄홀, 게오르그 바젤리츠, 클레어 타부레, 제레미 디미스터, 발렌틴 카론 같은 신진 예술가를 아우르는 미술품 컬렉션을 볼 수 있다.
    요바노비치의 샤토에서는 유명한 예술가와 슈테판 발켄홀, 게오르그 바젤리츠, 클레어 타부레, 제레미 디미스터, 발렌틴 카론 같은 신진 예술가를 아우르는 미술품 컬렉션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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